지금부터 4년 전인 2019년에 나는 우크라이나의 최대 항구 오데사를 여행했다. 훗날 이 땅에서 일어날 전쟁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역사적 영화 ‘전함 포템킨’의 촬영지인 ‘오데사 계단’을 찾아서 올라보았다. 오데사 계단을 따라 올라가 조금 더 걸어가면 광장에 멋진 동상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오데사 창립자 기념상’이다. 이 기념상이 기리는 오데사의 창립자는 바로 러시아 제국의 차르였던 예카테리나 2세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여 오데사가 속한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반도를 제국의 영토에 편입했다. 훗날 오데사는 러시아 제국의 곡물이 유럽으로 뻗어 나가는 핵심 무역항으로 성장했고, 번창하는 오데사는 1900년에 도시 창립을 기념하고 차르에 대한 충성을 표하고자 예카테리나 2세 동상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내가 본 예카테리나 동상은 1900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구체제의 상징인 차르의 동상을 남겨두지 않았다. 1920년에 동상은 철거되었고, 대신에 1965년에 소련에서 영웅으로 기념하는 전함 포템킨 수병들의 동상이 세워졌다. 예카테리나 동상이 돌아온 것은 소련이 해체되며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사라진 2010년 일이다. 차르에게 맞서 일어난 포템킨 수병들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오데사 계단을 올라온 나를 맞이해준 동상이 바로 그때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2010년에 예카테리나가 돌아올 때도 우여곡절은 있었다. 동상 설치가 결정되던 2007년, 당시 친서방 성향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유셴코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들이 반대 의사를 강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직접적 기원으로 언급되는 자포로제 코사크를 중앙집권화 명목으로 탄압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민족 서사에서 기념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오데사는 전통적으로 러시아계가 많이 거주하는 친러시아 지역이었고, 무엇보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와 관련이 없던 이 지역을 우크라이나에 편입해 주고, 오데사시를 세운 당사자가 예카테리나였기 때문에 어쨌든 황제의 동상은 설치될 수 있었다.
역사는 멈추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동상의 운명도 다시 바뀌었다. 2022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자국에 러시아의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탈러시아화 정책’을 실시했다. 도시의 창립과 무관하게 더는 러시아 황제가 오데사의 중심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고, 황제의 동상은 다시 오데사를 떠나야만 했다. 앞으로 오데사가 우크라이나의 땅인 한, 도시의 창립자가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데사의 예카테리나가 겪은 이야기는 ‘기념의 정치’가 얼마나 민감하고 지난한 일인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역사와 인물을 어떻게 기억할지 의견은 제각각이고, 그 의견은 자기 자신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특히 우크라이나처럼 여러 정체성이 복잡하게 교차했던 곳이라면 더욱 어렵고 민감한 문제다. 예카테리나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둘러싸고 최종적 합의를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와 오데사는 100년이 걸린 셈이다.
한국도 다시 갑작스럽게 ‘기념 정치’가 시작된 모양새다. 분단과 이산의 역사를 지닌 한국 현대사의 기억도 무척이나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다. 이런 어려운 문제를 기념상을 먼저 옮긴다고 풀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반대로,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공동체의 합의가 충분히 자리 잡은 뒤에야 기념상을 설치하거나 이전하는 것이 순서에 맞는 것일 테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모든 한민족을 우리 공동체로 여기는 정서와, 공산권과 치른 전쟁을 통해 국가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명확한 기억이 어지러이 섞여 있다. 지금 기념의 정치에 집중하는 정치권은 여태껏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이 난맥을 풀 역량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기념 정치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