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업씨(왼쪽)와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오른쪽).

2002년 대통령 선거는 조작된 허구가 선거판을 뒤집을 수 있음을 실증한 사례였다. 사기꾼 김대업의 허위 폭로로 지지율 1위를 달리던 이회창 후보가 치명상을 입고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법원은 병역 의혹이 깎아내린 이회창의 지지율 손해가 “최대 11.8%포인트”에 달한다고 판시했다. 실제 표 차가 2.3%포인트였으니 가짜 뉴스가 없었다면 제16대 대통령은 노무현이 아닐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기막힌 사기극의 주모자들이 응분의 단죄(斷罪)를 피해 갔다는 사실이었다. 김대업이 받은 처벌은 징역 1년 9개월에 불과했다. 민주주의 선거 제도를 능멸한 죗값 치고는 가볍기가 솜방망이 같았다. 허위 사실을 집중 보도하며 확산시킨 공영방송 책임자들도 누구 하나 내부 징계조차 받지 않았다. 김대업에게 올라타 정권 연장에 성공한 민주당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입을 씻었다.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자진 해산감이었지만 빈말이라도 미안하다는 한 마디조차 없었다. 당 대변인으로 공격에 앞장선 이낙연, 김대업을 “용감한 시민”으로 치켜세운 추미애 등 ‘병풍(兵風)’의 주역들은 저마다 승승장구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음모로 세상을 뒤집으려는 거짓 공작의 기획자들은 자신감이 붙었을 것 같다. 나중에 발각돼도 불이익당하지 않으니 거리낄 게 없어졌을 것이다. 이후 때만 되면 온갖 장르의 음모론이 등장해 나라를 뒤흔드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지금껏 주모자가 중벌 받는 일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일도 없었다.

‘김대업’으로 거머쥔 정권이 5년 만에 넘어가자 곧바로 ‘광우병 공작’이 시작됐다. 촛불 대란에 도화선을 당긴 MBC PD수첩은 의도적인 왜곡 방송이었다. 프로그램 작가가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 때” “정권 생명줄을 끊는 일”을 해냈다고 고백할 만큼 정파적으로 오염된 보도였지만 제작진은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수개월간 도심 시위를 주도해 천문학적 손실을 초래한 ‘광우병 대책 회의’ 역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대책 회의’를 구성한 수백 단체는 천안함·사드·세월호에서 양평고속도로·후쿠시마에 이르기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간판만 바꿔 달고 나타나 괴담이 범벅된 선동을 계속해 왔다.

거짓을 뿌리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거짓을 만들고 퍼트린 사람을 벌주는 것이다. 법을 위반했다면 최대한 중형을 때려야 하고, 형사 처벌이 힘들다면 사회적 평판의 힘으로 공공 영역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정치인이라면 선거를 통해 응징하는 필벌(必罰)의 관행을 세워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토록 숱한 음모론이 횡행했어도 공작의 주역들이 불이익 받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2010년 천안함이 폭침되자 민주당은 음모론 전문가인 신상철을 조사위원으로 추천해 ‘미군 개입설’이며 ‘이스라엘 잠수함 충돌설’까지 유포되도록 판을 깔아 주었다. 그래 놓고도 책임은 지지 않았다. 천안함 침몰이 북의 소행이 아닐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한 설훈은 지금 4선 의원이 되어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있다. ‘피로파괴·좌초설’ 괴담을 언급한 강기정은 광주 시장에 당선돼 중국·북한 군가 작곡가 정율성의 우상화 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성주 사드 기지 앞에서 춤추며 ‘전자파 괴담송’을 부른 박주민·소병훈·김한정 의원, 윤지오의 허언(虛言)을 “의로운 싸움”으로 칭송하며 그녀를 지키는 의원 모임까지 만든 남인순·이학영·정춘숙 의원, 최순실 사건 때 “박정희 통치 자금 300조원” “정유라는 박근혜 딸” 등의 아무 말 대잔치로 유명세를 탄 안민석 의원 등도 당선을 거듭하며 여전히 의원 배지를 달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가짜 뉴스계(界)의 새로운 스타로 등극한 김의겸 의원 역시 ‘청담동 술자리’ 헛발질 이후에도 거친 입심을 과시하며 왕성하게 활약 중이다.

‘세월호 고의 침몰설’에서 ‘오세훈 생태탕’까지, 괴담이란 괴담엔 빠지지 않는 김어준은 유튜브 구독자 135만명을 거느리며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부끄럽고 창피해 숨어 살아야 마땅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며 활개 치고 있다. 이 모든 음모론에 편승해 정치적 이득을 얻어온 정당이 제1야당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부터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작년 대선 직전 터진 ‘윤석열 커피’ 허위 보도는 20년 전 김대업 사건의 판박이다. 20년이 지나도 똑같은 선거 공작이 반복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거짓말 상습범을 퇴출시키는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했음을 뜻한다. 김대업을 “의인”으로 칭송한 정당, 광우병·천안함·세월호·사드 괴담에 올라타 혹세무민한 정치인·선동가들에게 응당한 책임을 물었다면 가짜 뉴스로 선거판을 흔들려는 민주주의 파괴 공작은 감히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짓 세력을 응징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다음 선거 때 또 어떤 아찔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