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식 장관을 보고 세 번 놀랐다. 왕방울만 한 눈에 한 번, 곱상한 입에서 튀어나오는 “치아라” “마, 됐다” 류의 사투리에 두 번, 그리고 휴대폰 번호가 큼지막하게 적힌 명함에 세 번! 명함에 관한한 보좌진은 극구 만류했으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관이라고 개인 번호를 명함에 넣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의원 시절에도 지역구민들 목소리를 (휴대폰으로) 직접 들었다.”
국가보훈부로 승격한 뒤엔 뉴스의 중심에 섰다. “인민군을 인민군이라 부르는 게 왜 색깔론인가”란 ‘어록’을 남기더니, 최근엔 “백선엽 장군이 친일이면 문재인 전 대통령 부친도 친일”이라고 해 고소를 당했다. 그는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감수해야 할 영광”이라고 응수했다.
◇친일의 기준 대체 뭔가?
-국회에서 작심하고 싸우더라.
“내 자리가 아직도 의원석에 있는 줄 착각하는 것 같다(웃음).”
-보수층에선 한동훈 장관보다 인기라던데.
“아이고, 무슨 말씀. 제가 제 급을 안다.”
-대통령이 장관들더러 ‘전사가 돼 싸우라’ 주문한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승만, 백선엽, 정율성 등등 보훈부와 관련된 이슈가 있어서 발언하는 것이지 대통령 지시가 온 적은 한번도 없다.”
-정권이 바뀐 걸 보훈부를 보며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부실하면 반도체를 잘 만들고, 탱크를 수출하고, K컬처가 성공해도 모든 게 사상누각이 된다. 국가의 품격은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고, 이를 좌우하는 보훈은 나라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본질이다.”
-’백선엽이 친일이면 문재인 대통령 부친도 친일’이란 발언과 관련해, 문 전 대통령이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나는 백선엽 장군이든 문 대통령 부친이든 일제라는 아픔의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에겐 같은 잣대가 적용돼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다. 언제까지 친일을 전가의 보도로 삼을 것인가. 젊은 세대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웃픈’ 현실이다.”
-민주당은 문 대통령 부친이 흥남시 농업계장을 한 건 해방 이후였다고 주장한다.
“문 대통령 부친은 1940년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최소 1945년까지는 일제 치하에서 관직을 맡았다는 뜻이다.”
-백선엽 장군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란 문구를 삭제해 ‘친일면죄부’란 비판도 받더라.
“나는 대한민국이 친일파 낙인 찍기에 주눅이 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도 친일로 몰아가지 않나. 친일로 찍히면 사회적으로 매장되니 아예 싸울 생각도 안 한다. 그런데 무엇이 친일파인가. 1948년 반민특위 때는 친일로 규정한 사람이 680여 명에 불과했다.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선 1006명으로 늘어났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엔 무려 4000명이 넘는다.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하나. 이번 기회에 무엇이 친일이고 애국인지 정면으로 논쟁해야 한다.”
◇누가 광주를 고립시키나
-정율성 역사기념공원 논란을 두고 강기정 광주시장은 박민식 장관이 광주를 고립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정율성에 왜 지역을 들먹이나. 누가 광주를, 호남을 고립시키나. 광주가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이 곧 광주다. 그런 진부한 전략이 호남의 젊은 세대에게 어필이 될까. 지역을 볼모로 표를 호소해온 정치인들의 철 지난 논리다.”
-친북이 문제라면 밀양의 김원봉 의열단 공원, 통영의 윤이상음악제도 없애야 할까.
“정율성은 6·25 때 대한민국에 총부리를 겨눈 적이자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우리 국민 수백 만을 희생시킨 전범이라 기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양의 경우 김원봉이란 이름 없이 그냥 ‘의열기념공원’으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을 기념하는 시설이다. 윤이상은 생애 후반부에 친북 행적이 있으나 대한민국을 위협한 인물은 아니다.”
-홍범도 흉상 이전 논란 와중에 보훈부는 이중 서훈을 문제 삼았다.
“이중 서훈으로 처음 문제가 된 건 여운형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별 4개 건국훈장을 받았는데 불과 2년 반 만에 별 5개 최고 등급을 또 한 번 받는다. 그것도 노 대통령 퇴임을 이틀 남기고. 훈장을 주려면 공적 조사가 추가로 필요한데 당시 보훈부가 심사한 자료는 전혀 없다. 외부의 힘에 의해 행안부가 급히 처리한 것이다.”
-홍범도 지사도 그런가?
“1962년에 이어 2021년 문재인 정부 때 최고 등급 훈장을 수훈했다. 안중근, 안창호, 김구 선생도 한 번만 받은 훈장을 홍범도 지사가 두 번 받은 건 장군의 유해를 카자흐스탄에서 모셔올 때 멋진 ‘그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훈이 정치적 도구로 가볍게 이용돼선 안 된다.”
-홍범도 논란을 비난한 중국 언론에 ‘내정 간섭 하지 말라’고도 했더라.
“윤 대통령의 대만 관련 발언에 중국 외교부가 ‘불용치훼’, 즉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한 걸 되돌려준 것뿐이다. 아직도 그들은 마치 500년 전 조공 받던 시대에 살고 있는 양 착각을 한다. 황당하고 가소롭지 않은가. 시인 윤동주 생가와 안중근 지사의 기념 전시실도 폐쇄해 한국인 관람객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심지어 윤동주 시인은 중국인, 안중근 의사는 조선족으로 구분해놨다. 윤동주가 시 한 편이라도 중국말로 쓴 게 있나. 국가가 영토를 빼앗겨서는 안 되듯 자국의 국민을 빼앗겨서도 안 된다. 중국 당국에 강력히 시정을 요청하고 있다”
-국가유공자 공적 재심사를 두고 ‘역사를 권력 앞에 줄 세우는 것’이란 비판도 나온다.
“지난 정부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그때는 잘한다고 박수 치다가 왜 이제 와 욕하는지 모르겠다. 국가유공자로 서훈이 되면 국민 세금으로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고 예우해야 하므로 공적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한다.”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
-이승만 대통령에겐 언제 꽂히셨나.
“보훈처장 되기 전엔 3·15부정선거, 자유당 독재로만 알고 있었다. 스무 권의 책을 읽어 보니 이분이 참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검사 출신인 제 입장에서 볼 땐 ‘정의’라는 관념에 맞지 않을 만큼 폄훼돼 있었다. 그분이 실제 이룬 성취와 후대의 평가가 극명하게 차이 나는 건 특정 세력에 의한 것이라고밖엔 볼 수 없었다.”
-당신도 86세대다.
“그래서 더욱 빠져들었다. 이승만이야말로 86세대가 추앙하는 ‘혁명 투사’ 아닌가. 왕정에 반대해 공화정을 세우려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다. 동료 장관들에게도 물어봤다. 놀랍게도 결론이 똑같더라.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 운동권 출신 원희룡 장관조차. 그런데도 방치해 온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세우겠다 공언한 건가.
“이승만 대통령 서거일, 탄신일에 국무회의도 빠지면서 참석했다. 박정희·김영삼·김대중·노무현 기념관도 둘러봤다. 건국 대통령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기념관이 하나 없나 자괴감이 들더라. 그래서 액셀을 밟았다.”
-정작 기념관 건립은 민간이 주도한다.
“대통령 기념관은 건립 비용의 30%만 행안부가 지원할 수 있다. 안중근·김구 기념관처럼 보훈부가 주도하면 100% 비용을 댈 수 있지만 그러면 기념관 명칭에서 ‘대통령’ 자를 빼야 하는 딜레마가 있다. 다행히 국민 모금 첫날부터 2000명 넘는 분이 3억원에 달하는 성금을 보내 주셨다고 한다. 국민들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절감했다. 보훈부도 곧 ‘비밀 병기’를 공개할 것이다.”
-’영웅을 기억하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직접 만들었나.
“그렇다. 권위주의, 독재정권에 대한 반발 심리 탓인지 우리는 제복 입은 사람을 폄훼한다. 군인은 ‘군바리’, 경찰은 ‘짭새’라 부르지 않나. 외국 정상들은 반드시 무명용사들 비부터 참배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국립묘지를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처럼 수많은 사람이 찾는 호국의 성지로 만들고 싶다. 6월 6일에만 반짝하는 게 아니라 1년 365일 국민과 호흡하는 곳으로. 이미 음악회, 영화제, 패션쇼를 열었다. 보훈의 가치는 미래에 있다.”
◇군인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윤석열 대통령과는 검사 시절부터 인연이 있더라.
“중앙지검 특수1부 수석검사일 때 사표를 냈더니 중국집으로 불러내 ‘너 같은 놈은 나가서 돈 벌기 어렵다’며 만류하더라(웃음).”
-대통령 윤석열은 어떤가.
“보훈에 진심이시다. 말려야 할 정도로. 지난 현충일에도 갑자기 시나리오에 없던 월남 참전자 묘역과 대간첩작전 전사자 묘역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천안함 티셔츠는 너무 자주 입는 것 아닌가?
“일반 정치인 같으면 한두 번 스포트라이트 받으면 더는 입지 않는다. 표라는 게 천안함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대통령은 그런 계산이 없다. 답답할 정도로 쇼와는 거리가 먼 분이다.”
-해병대 채수근 상병에겐 보훈부가 빛의 속도로 보국훈장을 수여했다.
“나라 위해 희생한 이들의 상처는 국가가 보듬어야 한다. 아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달라는 아버님 소망도 그래서 들어드렸다. 대통령이 ‘서해 수호의 날’ 전사자 55분의 이름을 호명한 걸 기억하나. TV엔 대통령이 울컥하는 장면만 나왔지만 현장은 울음바다였다. 김춘수의 시처럼, 이름을 불러주니 잊힌 전사자들이 영웅으로 되살아왔다.”
-그러나 20대 남성들에게 군대는 여전히 회피하고 싶은 곳이다.
“예비군 훈련 갔다고 교수들이 결석 처리했다는 기사를 보고 화가 났다. 더 예우를 해도 모자란데 벌점이라니. 그래서 보훈부가 군 복무한 청년들에게 정신적·물질적으로 보상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히어로즈 카드’다. 일상에서 다양한 혜택을 받게 할 것이다.”
-월남전에서 전사한 박순유 중령은 보훈부 장관이 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길까.
“일곱 살 때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 군복을 태우며 진혼굿을 하던 장면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학교에서 원호 대상자로 손을 들어야 할 때마다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런 기억들이 국가유공자 자녀를 위한 히어로즈 패밀리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번만 만날 수 있다면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란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홀로 6남매를 키운 어머니가 올해 87세더라.
“아버지 전사하신 뒤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예불을 드리신다. 소원을 빌어야 할 자손들 사진을 올려놓고. 작년부터는 대통령과 내 사진을 올려놓고 기도하신단다(웃음).”
-그래서 에너지가 넘치시나?
“특수부 검사 시절 새벽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센 놈을 잡아 넣을까 하며 설레었다. 지금도 비슷하다. 사명감이 솟구친다. 나라를,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
-근데 사투리는 잘 안 고쳐지나 보다.
“외교부에서 일하다 검사가 됐다. 특수부 유명한 선배 검사가 ‘박 검사는 사투리가 심해서 영어가 안 된다. 그래서 외교부에서 퇴출돼 여기로 왔다’고 농담하더라. 전혀 근거 없는 얘긴 아닌 것 같다, 하하!”
☞박민식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무부에서 재직하다 1993년 사법시험에 합격, 2006년까지 검사로 근무했다. 18대, 19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2022년 윤석열 정부 국가보훈처장으로 임명됐다가 올해 국가보훈부로 승격되며 장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