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7회>
한국어에 남아 있는 성리학의 용어들
한국의 정치인들은 절박한 순간이 닥치면 흔히 단식을 선언하고 드러눕는 카드를 쓴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주변에선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결단”이라 치켜세운다. “살신성인”은 <<논어(論語)>><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다. 비슷한 취지로 맹자는 사생취의(捨生取義, 생명을 버려서 의를 얻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전통 시대 유교 사회엔 그렇게 자기희생의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장시간 지속된 문화의 관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긴 세월 기독교의 훈습을 받은 구미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오, 하나님(oh, my god)”이라 말한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알게 모르게 날마다 성리학(性理學)의 숙어를 사용한다. “헌신(獻身)에 감사드립니다,” “의리(義理)를 지켜라,” “사람의 도리(道理)가 아니다,” “세상의 이치(理致)다,” “자연의 섭리(攝理)를 따라라,”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챙기지 마라,” “명분(名分)이 없다,” “사리(事理)에 어긋난다,” “천명(天命)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기미(幾微)가 보인다,” “혈기(血氣)가 왕성하다,” 등등. 이 모든 표현은 모두 성리학의 경전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그럴 리(理)가 없다”나 “설마 그럴 리(理)가·····”와 같은 말이 일상에서 가장 상용되는 성리학적 표현이 아닐까. 합리적 이유도, 타당한 원인도, 부득이한 까닭도 없을뿐더러 이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는 부조리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설마 그럴 리가!”하고 한탄한다. 조선 사상사 500여 년 성리학의 훈습이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한국인의 의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이다. 그렇다면 대체 리(理)란 과연 무엇인가?
이 세상의 리(理), 마음속의 리
대다수 현대인에게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암호처럼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전문 연구자들의 논문은 생경한 한자어투성이라 더더욱 읽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중세기 사람들의 철학 사상이 무턱대고 터무니없이 난해했을 리(理)는 없다. 정규 교육을 통해 인류의 지적 유산을 체계적으로 흡수한 현대의 교양인은 12세기 중세철학의 수준을 뛰어넘는 지적 훈련을 이미 이수했다. 그저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서 과거의 철인들과 쉽게 대화를 할 수 없을 뿐.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누구나 배우는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law of universal gravity)’만 생각해봐도 우리는 성리학의 리(理) 개념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
손에 쥔 사과를 허공에 던지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가 어김없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모든 물체엔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첫걸음마 할 때부터 넘어지길 반복하며 가까스로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기에 우리는 체험적으로 땅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음을 알고 있다. 뉴턴처럼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으로 물리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그렇기에 누구나 뉴턴의 이론을 공부하며 자연계를 꾸준히 관찰해가다 보면, 풀 한 포기, 돌 한 조각에도 지구의 중력이 일반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태양계를 포함한 전 우주에 만유인력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음도 훤히 깨닫는 때가 온다.
한편 중력의 작용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하다. 이 세상 모든 사물에 중력이 작용하지만, 중력이 가만히 있는 나를 일으켜서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던지게 하지는 않는다. 제아무리 고매한 성인(聖人)이나 위대한 지도자라도 절벽 끝에서 몸을 던지면 벼랑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자연 세계에서 중력은 항시적인 법칙으로 작용할 뿐, 변덕스러운 신처럼 인간의 개인사에 의지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중력은 물질세계 모든 사물의 조건이자 존재 원리일 뿐이다.
이상 설명한 중력의 법칙에 빗대보면 주희(朱熹, 1130-1200)가 말하는 리(理)의 의미도 쉽게 알 수 있다. 중력처럼 이 세상 어디에서나 작용하는 어김없는 법칙, 예외 없는 원칙, 조화로운 원리를 12세기 주희는 리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물론 그는 중력의 법칙을 알지는 못했지만, 이 세상에 항시적으로 작용하는 보편적 원리, 일반적 법칙, 일관된 원리를 직시하고 간파했다.
그는 이 세상의 원리를 직관하기 위해선 풀 한 포기, 돌 한 조각에 깃든 리를 하나씩, 하나씩 탐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격물(格物)의 공부다. 중력의 작용을 확인하기 위해 세상 모든 돌을 던져볼 필요가 없듯, 리의 현현을 확인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들을 다 탐구할 필요는 없다. 주희는 격물의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나 범우주적 자연에 작용하는 리에 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설파한다. 그렇게 하나로 관통되는 확연한 깨달음을 그는 활연관통(豁然貫通)이라 했다.
그러한 깨달음에 따르면, 리는 우주의 근원적 원리이자 삼라만상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법칙으로서의 리는 변덕스러운 신처럼 인간의 만사에 자의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주희에 따르면, 리는 “감정도 의지도 없고(無情意),” “계산도 헤아림도 없고(無計度),” “만들고 지어냄도 없다(無造作).” 마치 중력이 모든 물질에 일반적으로 작용할 뿐 감정이나 의지를 발휘해서 특정 대상에만 편파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과 같다.
중력은 자연계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적 법칙이다. 물질세계가 없는 중력은 있을 수 없다. 중력은 오직 자연계의 물질세계를 통해서만 작용한다. 현대 물리학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중력을 가지며, 중력 없는 물체란 있을 수 없다. 물체는 곧 중력을 가지며, 중력은 오직 물체를 통해서만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리는 질료와 형상을 갖춘 기(氣)의 세계를 통해서만 현현(顯現)할 수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고(不相離),” “서로 섞일 수도 없다(不相雜).” 리는 오직 기에 깃들어서, 기를 타고, 기를 통해서만 개별 사물과 형체로 구현된다.
물리학자들은 중력의 존재를 규명할 뿐, 중력의 당위를 주장하진 않는다. 반면 주희에 따르면 리는 모든 존재 세계의 원리(所以然)이면서 동시에 당위의 원칙(所當然)이다. 현대인에게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은 별개로 인식된다. 반면 성리학은 리의 개념을 인간의 성리(性理), 개인의 도리(道理), 사회의 윤리(倫理)까지 확장한다. 자연 세계의 일반적 이법(理法)을 근거로 인간 사회의 보편적 율법(律法)을 제정하려는 전일적(holistic) 사유의 산물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듯, 달이 차면 기울듯이, 너희도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인간 사회 어디에서나 너무나 흔한 이 같은 가르침은 윤리적 격언일 순 있지만, 도덕적 합리성에 근거한 실천적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일 수는 없다. 인간이 도덕적 존재라면, 그것은 자연적 본능의 세계에서 본성 그대로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개개인이 자기 스스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도덕적 추론에 따라 구체적 행위에 관한 실존적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현대 철학자들은 본성에서 도덕률을 유추하거나 존재에서 당위를 끌어내는 윤리학적 논증을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 부른다. (존재와 당위를 동일시하는 성리학적 사유에 관해선 앞으로 차차 논하기로 한다.)
퇴계의 “리자도설(理自到說),” 오독인가, 독창적 해석인가?
영어권, 중국어권의 철학자들이 거의 이구동성으로 조선 성리학의 특징에 대해 논하면서 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고 기술한다. 조선 성리학의 그러한 특징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2-1571)에게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황은 어려서 한 떨기 난초가 되길 꿈꾸며 수도사와 같은 구도의 삶을 살았다. 그런 이황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야 비로소 한평생 궁구하던 리의 의미를 되새겨서 소위 “리자도설(理自到說)”을 정립했다. (그 시점이 임종 50일 전인지, 20여 일 전인지는 지금도 학계의 논란거리다.)
“리자도(理自到)”란 “리가 절로 이르다”는 정도의 의미이다. 앞서 보았듯, 주희는 리가 감정도 없고, 작위도 없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황은 과감하게 “리가 절로 이른다”는 명제를 자기 철학의 새로운 테제로 정립했다. “리자도설”을 세우기 위해서 당시 이황은 주희의 문집에서 발견되는 “리도(理到)”의 몇 가지 용례를 꼼꼼히 짚어가며 그 뜻을 재음미했다.
주희 문집에서 “리도”와 관련된 몇 가지 용례를 찾아서 서신으로 보내온 인물은 다름 아닌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었다. 기대승은 1558년부터 1566년까지 무려 8년에 걸쳐서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선 성리학의 정수라 불리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던 바로 그 인물이다.
기대승은 주자 문집 등 성리학의 기본 교과서에서 “리가 절로 이르다”로 해석될 수 있는 몇 가지 구절을 찾아내서 이황에게 보냈다. 200자 원고지 두 장 분량도 안 되는 354자의 실로 소략한 내용의 편지였는데, 바로 그 편지에 적힌 몇 가지 용례에서 이황은 한평생 붙들고 깊은 고민을 해온 리의 자발성과 운동성을 논증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발견했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흡사 한평생 찾아 헤매던 금광을 급기야 찾아낸 듯한 긴장과 흥분이 느껴진다.
“이전에 나는 리의 본체가 무작위(無作爲)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리의 묘용(妙用)이 드러나서 움직일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해 리를 거의 죽은 것(死物)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진정 도(道)에서 심히도 멀리 벗어나 있었습니다.”
주희는 분명히 “형이상(形而上, 형체 이전)”의 원리로서의 리는 스스로 일어나거나 움직이거나 사물에 다가가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오직 형체를 갖춘 형이하(形而下, 형체를 갖춘)의 기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내재적 섭리라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주희에 따르면, 리는 오로지 형상과 질료를 갖춘 물질세계의 기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우주적 원리이다. 그러하기에 이황은 리를 “죽은 사물”처럼 취급하고 있었는데, 기대승이 주자 문집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준 “리도(理到)”의 용례를 보고서야 “리가 절로 이른다”는 명제를 주자의 뜻이라 주장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한국어에 “뜻이 가슴에 와닿는다”는 표현이 있듯, 이황은 리도를 “리가 와닿는다”고 새길 수 있다고도 생각했던 듯하다.
그렇게 뜻을 풀어도 이황이 리가 사물로 나아간다며 리의 활동성, 작용성을 주장했다면, 주희의 원뜻에서 멀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법칙으로서의 중력이 하찮은 미물의 세포핵에까지 엄연하게 작용한다고 해서 우리는 중력이 그리로 다가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중력은 물질세계에 디폴트로 작용하는 존재의 근본 조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희 문집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주희가 말하는 리는 그렇게 감정도, 작위도 없는 형이상의 섭리로 설정되어 있다. 사물이 있다면 이미 그 속에 리가 깃들어 있으며, 리가 없다면 사물이 있을 수 없다.
그 점에서 이황은 지엽적인 일부 용례를 들어서 리의 본뜻을 오독하고 왜곡했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주희의 문집에 드물게 나오는 “리도(理到)”의 용례만을 짚어서 “리가 이르다”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많은 무리가 따른다. 상식적으로 주자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의 문집에서 적어도 수천 번의 비슷한 용례가 발견되어야 정상이다. 그토록 중요한 주장이라면 과연 주희가 평생에 걸쳐 겨우 몇 차례만 언급하겠는가?
기대승은 주자 문집을 통틀어서 불과 대여섯의 비슷한 용례만을 찾았을 뿐이다. 그마저도 전체 맥락에서 문장을 상세히 분석해 보면, “리자도설”의 충분한 증거가 되지도 못한다. 바로 그런 이유를 들어서 율곡(栗谷) 학파는 실제로 퇴계가 주자의 참뜻을 오독하고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퇴계의 오독은 주자학 자체의 모순과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주체적이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시도로 볼 여지는 있다. 철학사를 돌아보면, 창의적 오독이 새로운 사유의 돌파구가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황은 한평생에 걸쳐서 “리발(理發, 리가 발현하다),” “리동(理動, 리가 움직이다),” “리도(理到, 리가 다가오다)” 등의 주장을 펼친 조선의 대표적 철인이다. 임종을 앞두고서 그는 리도를 더 강조하여 리자도설(理自到說)을 정립했다. 과연 왜 그는 주자의 해석에 배치된다는 비판까지 감내하면서 리의 자발성, 활동성, 작용성을 밝히려 했을까?
그 점에 대해서 후대 학인들은 흔히 퇴계가 사회 윤리와 개인 도덕의 절대적 표준을 제시하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한다. 퇴폐적인 사회 풍조를 막고 풍속을 일신하려는 적극적 의지의 표명이라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성학(聖學)의 이념을 완수하며 구도의 삶을 살았던 이황 개인의 자기완성에의 의지였다고 푸는 학자도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퇴계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퇴계 스스로 리발, 리동, 리도의 거대한 함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힌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만년의 이황이 리에 관한 주자의 정설을 과감하게 뒤집는 학문적 스턴트를 시도했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과연 오독인지 독창적 해석인지 분명히 가리기는 힘들다. 이와 관련해서 그가 남긴 문장이 너무나 소략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퇴계의 철학은 미완의 프로젝트였다. <계속>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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