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이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퇴임 후 서울 온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첫 행사가 9·19 기념행사인 것이 뜻깊다고 했다. 잊히고 싶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주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 연설로 잊으려는 시절을 또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진 진보 정부에서 안보 성적도, 경제 성적도 월등 좋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보는 보수 정부가 잘한다, 경제는 보수 정부가 낫다는 조작된 신화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강한 어조로 연설했다. 보수 정부를 향해 ‘조작된 신화’ 운운한 데서 문 전 대통령의 불안과 초조가 드러난다. ‘조작’은 문 전 대통령이 속한 정치 세력이 사용해온 단골 메뉴 아니던가.

상경(上京) 연설을 통해 문 전 대통령은 안보 분야에서 2018년 9·19 선언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남북 군사 합의를 꼽았다. 5년 전 발표 당시부터 조작 비슷한 것이 드러난 기억이 떠올랐다. 조선닷컴에 24시간 온라인 기사를 내보내는 디지털편집국을 총괄하던 때였다. 군사 합의 가운데 우리 덕적도와 북한 초도를 잇는 구역에서 해상 기동훈련, 사격 훈련 등이 중지되는 서해 완충 수역을 설정했는데 길이가 남북 각각 40㎞, 총 80㎞라고 발표했다. 디지털편집국 소속의 두 젊은 기자(양승식, 변지희)가 구글맵을 분석해 정부 발표가 엉터리임을 밝혀냈고 곧바로 온라인 기사로 특종 보도했었다. 수역 길이는 남측 85㎞, 북측 50㎞의 총 135㎞로, 우리 측이 35㎞나 더 양보했다. 그날 밤 국방부 대변인실은 “완충 수역 내 북측 해안포 108여 문, 우리 측 해안포 30여 문, 해상에서도 황해도 인근 북측 경비함정이 우리 측보다 수배 이상 운용하고 있음을 고려 시 특정 선을 기준으로 상호 등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해명 문자를 국방부 출입 기자들에게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에 잘못된 발표임을 공식 인정했다. 협상 내용을 놓고 논란이 일자 또 희한한 추가 설명을 냈다. 정권 바뀌고 최근에야 9·19 군사 합의 협상 당시 북한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을 무방비 상태로 몰아넣으려고 얼마나 부당한 요구를 했었는지가 드러났다. 그 황당했던 서해 완충 수역도 문 대통령의 방북 및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졸속 합의한 것이었다. 조작된 평화였다.

경제 분야 통계 조작은 5년 내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감사원이 문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4명과 경제수석, 국토부 장관, 통계청장 등 22명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집값 통계는 5년간 최소 94차례 조작됐다고 한다. 조작 압력이 얼마나 심했으면 한국부동산원 노조가 경찰에 제보했겠나. 소득 주도 성장의 일환으로 최저임금을 급격히 인상했더니 최하위층 소득이 급감하고 소득 분배가 최악이 됐다. 소주성 설계자라는 청와대 경제 수석은 엉터리 분석 자료로 실패를 덮었다. 말 안 듣는 통계청장은 교체하고 악화된 지표는 산정 방식을 바꿨다. 탈원전은 경제성을 조작해서 강행했다.

‘조작’은 ‘내로남불’과 더불어 문 정부 국정을 압축하는 단어다. 문 전 대통령이 보수 정부를 향해 ‘조작된 신화’ 운운하는 건 영 어색한 공격이다. 보수 정부가 늘 국민 기대에 부응하게 유능한 건 아니었고 실망도 시켰지만 문 정부처럼 심각하게 통계를 조작하고 대놓고 국민을 속이지는 않았다. ‘조작된 신화’ 구축의 장본인은 문 전 대통령이다. 퇴보 정권이면서 진보를 자처한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문재인 정부는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열었다”고 경제 치적인 양 자랑하는데 문 정부 성과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3만달러 시대가 열리는 2017년에 문 정부가 출범했다.

1963년에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를 겨우 넘은 최빈국 대한민국은 31년 만에 1만달러 시대에 고속 진입했다. 그 2배인 2만달러로 가는 데는 12년이나 걸려 2006년에 도달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성장이 둔화하면서 3만달러에 진입하는 데도 11년 걸렸다. 한국 경제를 직시하고 책임 있는 정부라면 규제 혁파와 혁신을 통해 새로운 미래 성장 동력을 찾아내는 데 국정 역량을 집중했을 것이다. 이전 박근혜 정부로부터 흑자 재정, 초과 세수를 물려받고 세계 경제 여건도 좋을 때 출발했건만 문 정부는 노조 편향, 반(反)시장 반기업의 이념 정책을 고집하면서 고용 참사에, 집값 전셋값을 들쑤셔놨다. 5년 새 국가 부채 400조원, 가계 부채 400조원을 늘렸다. 합계 출산율 1명대 초반을 간당간당 유지하던 초저출산율이 문 정부 때 1명 이하로 뚝 떨어져 초초저출산율이 됐다. 집값 뛰면 출산율이 하락한다는 분석도 있다. 무능이 드러날 즈음에 코로나 팬데믹이 그걸 덮었다. 온갖 포퓰리즘 정책 덕에 운칠기삼(運七技三) 아닌 운구기일(運九技一)의 실력만 있었어도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력조차 없어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든 무능의 좌파 정권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국민 상당수가 뻔히 아는 사실을 외면한 채 문 전 대통령은 지지자에게 둘러싸여 자화자찬 연설로 첫 상경 행사를 치렀다. ‘벌거벗은 임금님’ 행차를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