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TV에서 미국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 기이하고 충격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물어보니 이런 영화를 컬트(cult) 영화라고 한다고 했다. 좋은 영화라는 느낌은 없었지만 충격적이어선지 지금도 몇몇 장면은 생생히 기억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는 소식과 그가 정치 인생의 최대 고비를 넘었다는 평가를 들으면서 먼저 든 생각은 컬트 영화였다. 기이하고 충격적인 장면이 연속되는 한국 정치가 또 하나의 기억에 남을 장면을 만들어냈다.
심각하고도 다양한 개인 비리 혐의를 받는 이 대표가 국회 압도적 다수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것 자체가 ‘컬트’적이었다. 상식선에서는 군소 정당의 대선 후보가 되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그런 그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날은 이 컬트 영화의 막이 오른 순간이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민주당 대선 후보들 중 이 대표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의 많은 불법 혐의는 거의 모두 문재인 정권 때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피해자’라고 할 수도 없다. 이 대표의 과거 충격적 언행도 다른 민주당 후보들에게선 들어본 적이 없다. 특별히 민주당과 밀접한 삶의 궤적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에게 민주당은 공천받고 당선되는 데 필요한 도구에 가까웠다. 그래도 대선 후보가 됐다. 이것이 한 개인의 빛나는 성취든, 한국 정치의 병리 현상이든, 분명한 것은 그 이후 우리 정치가 컬트 영화처럼 흘러갈 것이란 사실이었다.
이 대표는 대선에서 낙선했지만 접전을 벌여 대중적 지지 기반을 마련했다. 그런 그가 대선 기간 잠시 미뤄진 검찰 수사를 순순히 받고 법의 심판을 기다릴 리는 없었다. 이미 대선 기간에 이 대표에겐 낙선할 경우의 ‘플랜 B’가 있었고, 그것은 대선 후 즉각 국회의원이 되고 민주당 대표가 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검찰 수사와 구속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려면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조기 당대표 선거가 필요했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민주당 대표가 당의 대선 패배 책임을 진다면서 사퇴해 당대표 선거를 만들어줬다. 사퇴한 대표는 또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면서 의원직까지 사퇴해 국회의원 보궐선거까지 만들어줬다. 대선이 끝나고 많은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컬트 영화는 2막을 알리고 있었다.
그 후 이 대표가 쉴 새 없이 탄핵, 해임, 국정조사, 특검을 요구하고 민주당이 여당일 때도 하지 못한 법들을 마구 통과시킨 것은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위력 시위였다. ‘수사 중단’과 ‘국정 협조’를 맞바꾸는 딜을 하자는 것이었다. 윤 대통령이 딜을 할 뜻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구속영장 청구가 임박해지자 택한 것이 ‘단식’이다. 야당 대표가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 개인 비리 구속을 피하기 위해 단식을 했다. 한 마디로 컬트 단식이었다. 구속될 가능성이 있어서 단식까지 했는데 막상 그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도 컬트 영화에 어울릴 반전이었다. 이 기각으로 제일 놀란 사람은 이 대표일지 모른다.
아직 이재명 컬트 영화가 끝나려면 멀었다. 내년 4월 총선은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대선 연장전처럼 돼버렸다. 국민의 40%가 ‘대장동은 윤석열 게이트’라고 답하는 실정이다. 4월 총선이 또 어떤 컬트적 결과로 관객들을 놀라게 할지 모른다.
이재명 컬트 영화가 계속 돌아갈 수 있도록 동력을 공급하는 것은 윤 대통령의 낮은 지지도다. 윤 대통령 지지도가 높았다면 이 대표에 대한 수사가 이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선거를 많이 치러본 정치인들은 대통령 지지도가 40%에 못 미칠 때 여당의 총선 결과는 낙관할 수 없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안정적으로 40%를 넘은 적이 없다. 윤 대통령 스타일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여러 얘기를 종합하면 윤 대통령의 문제는 ‘이 일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고민이 부족하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선거에선 다른 사람들 정서를 잘 살피지 않으면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공천도 그중 하나다. 홍범도 동상 문제를 결정하듯이 공천이 이뤄지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다.
4월 총선은 다음 2027년 대선 컬트 영화의 예고편이다. 앞으로 이 대표 재판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대선 때까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재판을 받으며 대선에 출마하는 것 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설마’는 통하지 않는다. 컬트 영화엔 ‘설마’가 없다. ‘한계’나 ‘넘어서는 안 될 선’도 없다. 윤·이 두 사람이 그리는 쌍곡선의 결말은 오리무중이다.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은 윤 대통령 하기 나름이고, 윤 대통령이 져야 할 책임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