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닥 ‘황제주’ 에코프로는 정부의 R&D(연구·개발) 사업을 수행하면서 2차전지 핵심 소재인 양극재와 인연을 맺었다. 2004년 삼성 계열사인 제일모직이 온실가스 저감 분야의 기술 벤처기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에코프로에 양극재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 참여를 제안했다. 이후 제일모직이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양극재 사업을 정리하려 하자 에코프로는 관련 기술까지 모두 사들여 독자 개발을 추진했다. 수많은 실패와 낙담을 이겨내고 에코프로가 본격적으로 제품 양산에 들어간 것은 2016년. 정부 R&D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 12년 만이다. 에코프로 이동채 회장은 한 강연에서 “그 당시엔 사방팔방으로 돈을 꾸러 다니는 게 가장 큰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양극재는 한국을 대표하는 소재 산업으로 성장했고, 에코프로의 올해 매출은 무려 9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양극재 개발은 1980년대 D램 반도체, 1990년대 CDMA(미국식 디지털) 이동통신과 함께 대표적인 국가 R&D 성공 사례로 꼽힐 만하다. 문제는 기술 고도화로 더 이상 혁신 기술이 나오기 어려운 탓인지, 아니면 과학계의 폐쇄성과 홍보 부족 탓인지 이런 성공 사례를 찾기가 갈수록 힘들다는 점이다. 정부가 R&D 예산 효율화를 내걸고 내년 예산을 5조2000억원(16.6%)이나 삭감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문재인 정부 5년간 R&D 예산이 무려 10조원이나 늘어난 데다, 일본 정부와 불필요한 갈등을 빚으면서 시작된 일본산 소재·장비 국산화(2.7배 증액), 코로나 감염병 대응(3배), 중소기업 지원(2배) 등 제대로 된 심사조차 없이 재난지원금 살포하듯 돈을 뿌렸다는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비대화된 R&D 예산을 정상화하는 과정인 셈이다.
하지만 정부가 간과한 게 있다. ‘줬다가 뺏는 것.’ 즉 한껏 늘어난 예산을 줄여야 하는 현장의 고통과 반발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인간의 비이성적인 의사 결정 과정을 분석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이처럼 ‘얻는 것보다 잃는 고통을 훨씬 크게 느끼는 심리 현상’을 손실 혐오(loss aversion) 성향으로 설명했다.
실제로 과학계의 반발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연구노조에서 시작해 수학·물리학·화학·지구과학·생물과학·통계학회, 전국 대학 기초 연구소 연합회 등 내로라하는 학회는 물론 서울대·연고대·카이스트·포스텍 등 주요 대학 학생들까지 반발 성명 대열에 합류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과학자들이 “R&D 예산 삭감은 국가 파괴 행위” “과학자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 말라” 등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집단 반발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심지어 최근 강연차 한국을 방문한 노벨상 수상자 5명도 R&D 예산 삭감에 우려를 표했다.
과학자들은 특히 지난 6월까지만 해도 예산이 5%가량 증액되는 분위기였는데 정부의 ‘카르텔’ 질타 이후 갑자기 대폭 삭감으로 돌아선 것, 이 과정에서 과학자들을 상대로 한 소통과 설득이 없었다는 것, 대통령실에 리더십을 발휘할 과학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한 과학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인수위 때부터 R&D 혁신을 주문했는데, 정부에서 1년 6개월을 허송세월로 보내다가 뒤늦게 움직이면서 모든 연구 기관에 대해 20% 안팎의 일괄 삭감이라는 황당한 정책이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들이 쏟아내는 불만 중에 가장 공감이 가는 대목은 미래의 과학자를 꿈꾸는 젊은 세대가 직격탄을 맞을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정부 출연 연구소 25곳이 정부 예산 삭감을 가장 손쉬운 인건비 줄이기로 대응할 경우, 연구소에 근무하는 박사 후 과정 연구원 등 4900명 중 1200명의 인재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윤석열 정부의 장점이자 단점이 소신과 결단력이라고 한다. 각종 정책의 방향은 옳지만 방법이 다소 거칠고 디테일에 약하다는 것이다. 이번만큼은 과학계의 불만에 귀 기울이는 경청의 리더십을 발휘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