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백형선

요즘 야간에 대학 병원 내과, 외과 입원 병동에서 의사 얼굴 보기가 어렵다. 입원 환자를 돌보는 전공의 숫자가 줄어든 데다, 이들은 주로 낮에만 병원에 머문다. 각 대학 병원이 입원 환자를 보는 입원 전담 전문의를 채용하려 하지만, 연봉 2.5억~3억원 모집 공고에도 구하기 어렵다. 그만큼 의사가 없다. 대학 병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야간 입원 병동을 아슬아슬하게 운영하고 있다.

최근 서울의 유명 대학 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5명이 집단 사직했다. 수입이 좋은 개업 마취·통증 전문 병원으로 간 것이다. 마취과 교수들의 사직 도미노는 거의 모든 대학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암 수술이 밀리고, 수술실 한둘 닫는 일도 벌어진다. 야간 응급 수술 당직을 서야 하는 마취과 교수들이 대학을 사직하고, 그 자리에 당직 없는 마취과 촉탁 의사가 근무하기도 한다.

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등에서는 젊은 교수를 찾기가 어렵다고 하소연이다. 젊은 의사들이 ‘3무(無)’, 즉 응급 수술 없고, 밤 당직 없고, 의료 소송 없는 분야로만 간다는 것이다. 두 달 전에는 유명 대학 병원 흉부외과 교수 2명이 하지정맥류 시술을 하는 클리닉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공 관절, 관절경 수술을 하던 정형외과 전문의들도 종합병원을 나와서 주사와 물리치료만 하는 곳으로 옮겨가거나 대거 개업하고 있다. 진료비를 보험 회사가 내주는 이른바 실손 보험 가입 환자들을 대상으로 주사 치료만 해도 수술 의사보다 벌이가 좋기 때문이다. 대학 병원 응급실을 지켜야 할 응급의학과 전문의 상당수가 일반 환자 진료 개업의로 나오고 있다.

한편 의대를 갓 졸업한 신참 의사들은 대거 미용 의료로 빠져 나간다. 전문의가 되기 위한 인턴(1년), 레지던트(3~4년) 과정을 아예 거치지 않고 잉크도 마르지 않은 의사 면허증을 들고 피부과 성형외과 의원을 찾는다. 보톡스, 필러, 피부 레이저 등 미용 의료 시술은 의사만 할 수 있기에 주로 기업형 미용 의원들이 신출내기 의사를 월급 1000만원에 채용해 시술에 돌리는 것이다. 각 의과대학별로 졸업생의 10~20%가 이런 식으로 미용 의료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중에는 카이스트 출신, 과학고 나온 수재형 인재가 수두룩하다.

이왕준 대한병원협회 KHC조직특별위원장은 “지방은 필수 중증 의료 분야 의사를 못 구해서 의료 공백 사태로 이어지고 있다”며 “30여 년간 의료 현장을 지켜본 이래 지금이 한국 의료 최대 위기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병원계에서는 특단 조치를 하지 않는 한, 필수 중증 의료 인프라가 무너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의료 정책 전문가들은 필수 의료 분야 보상을 늘려서 이 분야 인력 유입을 늘리는 한편, 미용 의료로 의사들이 빠져나가는 데에 차단벽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의대 정원을 늘려서 부족한 의사를 채워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는 의대 졸업 후 의사 면허만 받으면 바로 독자적으로 환자를 진료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신참 의사 면허자들이 미용 의료로 가서 환자를 진료하고 주사를 놓는다. 하지만 선진국은 의사 면허를 땄다고 바로 환자를 진료할 수 없다. 일본은 2년간 종합병원에서 임상 연수를 받아야 하고, 미국과 영국 등도 1~2년간 종합병원에서 임상 연수를 해야만 독자적으로 환자 진료를 할 수 있다. 미용 의료 시술도 의사 감독 아래 의료 기사(테크니션)나 간호사도 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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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고려대 의대 교수) 의학한림원 부원장은 “환자 안전과 보호, 우수 의사 양성을 감안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며 “필수 의료 강화 방안도 젊은 의료진, 간호진의 근무 양태나 방식에 맞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은 젊은 의사들의 미용 의료 진출이 활발하지 않은데, 필수 의료에 대한 확실한 보상과 미용 의료 의사 독점을 없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우리나라는 모집 정원이 40~49명인 미니 의과대학이 17곳이나 있다. 전체 의대 40곳의 43%를 차지한다. 군의관 등 특수 목적이 아닌 이상 이렇게 미니 의대가 많은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국내 최다 2732병상에, 한 해 수술 건수가 7만여 건, 학술 논문 1400여 편에 이르는 서울아산병원이 속한 울산대도 의대 정원이 40명이다. 삼성서울병원, 강북삼성병원, 삼성창원병원 등 대학 병원 3곳 6600여 병상과 입원 환자 연인원 100만명이 넘는 성균관대도 의대 정원은 40명이다. 전국에 대학 병원을 여럿 운영하는 을지대, 차의과학대도 마찬가지다. 세계의학교육연맹에서는 조별 실습과 종합 교육을 위해 의대 정원을 80~100명으로 하기를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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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내 전체 의대 정원은 3058명이다. 이는 지난 2000년 의약 분업 파동 때 10%를 감축한 수치다.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임상 의사 수는 2.5명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꼴찌 수준이다. OECD 평균은 3.7명이다. 인구당 의대 졸업생 수도 OECD 국가 중 바닥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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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진 대한외과학회 이사장은 “요즘 의대 정원 확대 논의가 많은데, 그에 따른 실질적 효과를 빠르게 보려면, 300여 명에 해당하는 감축된 의대 정원 10%를 복원하고 효율적 의사 양성을 위해 미니 의대 정원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기초 의대 교수 25명, 임상 교수 87명이 동시에 있어야 의대 설립이 가능한데, 현 상황에서는 우수한 의대 교수진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안덕선 전 세계의학교육연맹 부회장은 “의사 정책은 국민 건강과 수명, 국가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 사안”이라며 “선진국처럼 의료 인력 수급을 적정 관리하는 위원회를 운영하고, 의사 면허를 관리하는 독립적 기구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