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공중보행교 전경.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다시 걷는 세운, 다시 찾는 세운, 다시 웃는 세운' 3가지를 목표로 건설됐다./뉴스1

얼마 전 서울 도심의 세운상가 공중 보행로에 가봤다. 이 보행로는 종묘 앞 세운상가에서 퇴계로 진양상가까지 7개 건물을 잇는 1km 구간이다. 박원순 시장 시절 서울시가 1100억원을 쏟아부어 완성한 것이다. 흐린 날씨 탓인지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을 법한 점심시간대였는데도 인적이 드물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보행로 건설 당시 하루 통행량이 1만3000명에 이를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예상의 5~17%에 불과하다. 또 보행로를 받치는 각종 구조물 탓에 지상 도로와 인도의 동선(動線)이 꼬이고, 세운상가의 슬럼화로 전체 방문자 숫자도 보행로가 생기기 전에 비해 오히려 50%나 줄었다고 한다. 건축 문외한인 기자의 눈에도 1968년 완공한 세운상가와 주변의 낡은 ‘벌집’ 점포들 사이로 뻗은 새 보행로가 생뚱맞게 보였다.

박원순의 서울시는 이 보행로 건설을 할 때 세운상가 일대를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제조 신기술의 허브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걸었다. 목표대로라면 보행로를 따라 설치된 30여 개 사무 공간에는 지금쯤 드론, 반도체 장비, 모빌리티, 스마트 의료 기기 등 첨단 제품의 개발실로 넘쳐나야 하지만 실제로는 텅 빈 공간뿐이었다. 스타트업과 대학의 창업 인큐베이터 시설이 입주하기로 했던 아세아 상가는 아예 재개발을 위해 철거돼 버렸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판교·분당 등 수도권에 새로 지은 창업센터가 즐비한데 낡은 건물에서 일을 하려는 젊은 직원들이 있겠느냐”면서 “쓰러져 가는 건물 앞에 새 육교가 생겼다고 해서 직원들이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혈세(血稅) 1100억원이 투입된 보행로가 ‘계륵’ 신세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이 보행로는 완전 개통된 지 2년 만에 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오세훈 현 시장의 서울시는 세운지구 일대 상가 7개동을 모두 허물고 30~40층짜리 고층 빌딩과 녹지가 들어서는 도심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대규모 개발을 못 하게 171구역으로 쪼갰던 세운지구를 39구역으로 다시 통합하고 고도 제한 등 규제 완화에도 시동을 걸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세운지구 전체(44만㎡)가 순탄하게 재개발된다면 수십 조원이 투자되는 역대 최대 규모의 도심 재개발 사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건축 전문가들은 개발보다는 ‘보존’에 방점을 둔 박원순식 세운상가 재생 사업을 “하지 말았어야 했던 실패작”이라고 단언한다. 한국 1세대 대표 건축가인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가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라는 상징성이 있긴 하지만 주변까지 급격히 슬럼화되는 것까지 방치하면서 보존해야 하느냐는 지적이다. 특히 낡은 건물 사이를 관통하는 공중 보행로 하나로 죽어가는 상권을 되살리는 ‘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서울시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유명 건축가는 “박원순 시장 시절엔 건설업체에 개발 특혜를 줘서는 안 된다는 좌파 논리가 회의를 지배했고 세운상가는 도심 개발을 막는 최악의 건축물이 됐다”고 말했다.

세계의 도시들은 지난 10여 년간 박원순의 서울시와는 정반대로 갔다. 골목 살리기 식의 도시 재생보다는 대규모 도심 개발을 통해 새로운 랜드마크를 만들었다. 글로벌 금융 지구로 변신한 일본 황궁 앞 마루노우치, 철도 기지를 고급 주상복합 단지와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뉴욕 허드슨야드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이 대규모 개발을 통해 경제 활성화와 도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일본 마루노우치를 가보면 옛 건물의 전면부만 보존한 고층 빌딩, 100년 넘은 문화재를 둘러싼 빌딩 등 기발한 상상력이 넘쳐나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잠실 롯데월드를 설계했던 일본의 원로 건축가는 취재차 일본을 방문했던 본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일본의 도시 전문가들은 청계천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도심을 흐르는 인공 하천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지요. 청계천은 일본 도심 개발의 모멘텀이 됐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이후 아파트를 짓는 것 외에는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더군요.” 뼈를 때리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