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실업계 고교, 전문대 졸업 후 제조업 근무 10년이란 이력 탓에 실업계 고교 강연을 자주 다닌다. 쉬운 일은 아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하는 강연은 독자들이 먼저 나를 찾아온다. 자기 시간을 들였으니 이야기에 깊게 몰입한다. 반면 학교는 내가 먼저 학생들을 찾아간다. 학생들에게 나는 불청객에 가깝다. 단상에 서서 같은 실업계 출신임을 어필해 보지만 절반이나 관심 보이면 다행이다. 원하는 이야기를 짚어내기 힘들고 집중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강연을 마다하지 않는다. 단 한마디, 학생들한테 초조해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다.

실업계 고교 학생 중 상당수가 현장 실습을 나간다. ‘약간 어렵고 힘든 아르바이트’를 생각했다가 그 열악함에 기겁한다. 대부분 중소기업이며 근로기준법, 최저임금 안 지키는 회사들이 널렸다. 잠깐 방심이 산재로 이어지는 위험한 일을 하지만 사회에선 경력으로 쳐주지 않는다. 회사 선배들은 “이런 곳에서 일하면 미래가 없다”라며 진심 어린 조언을 한다. 그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닫는다.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알약’을 먹는 셈이다.

대부분 실업계 고 학생에게 현장 실습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지만 동시에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인간은 난관에 부닥치면 자기 상황을 객관화하고 미래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고민한다. 이 과정을 극복해 가는 동안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간다. 나 또한 빚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받았고 상환 과정에서 점차 자아가 단단해지는 경험을 했다. 빚이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갚아보니 “젊을 땐 사서 고생한다”란 격언이 엉터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현장실습 경험을 통해 자기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학생도 꽤 많으리라.

여기까진 분명 긍정적인 변화의 조짐이다. 동시에 조급함이 난입하기 가장 좋은 시기다. 현장 실습에서 돌아온 실업계고 학생들은 자신이 또래들 평균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거나 대·공기업 취업한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위치가 평균 아래란 생각은 초조함을 동반한다. 나는 그 초조함이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걸 직접 보았다. 2021년 초 현대로템 하청 회사에 입사했고 20대 초·중반의 상용공(하청 회사 정규직)들과 함께 현장에서 일했다. 다들 원청인 현대로템 정규직이 되기 위해 열심히 도면을 외우고 밤엔 학원에서 용접 연습도 따로 했다. 그러다 비트코인 광풍이 불었고 옆 부서에서 7억원을 환전해 그대로 회사를 나갔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그때부터 쉬는 시간마다 결혼 자금을 부었다, 주택청약예금을 깼다는 등등의 말이 오갔다. 대부분 투자에 실패했고 많게는 수천만원까지 잃었다. 그 광기의 투기판에 뛰어든 이유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함이 아니었다. 대부분 정규직을 달지 못했다는 초조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초조함은 이렇듯 잘해보고자 하는 의지를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다. 그래서 강연마다 삶 속에 초조함 대신 꾸준함을 채워 넣으라고 계속 강조한다. 물론 모든 꾸준함이 합당한 대가로 돌아오진 않는다. 어쩌면 오랫동안 쌓아 올린 나만의 역량이 영영 빛을 못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꾸준함이야말로 꽤 확실한 안전자산이다. 이 안전자산을 뽐낼 기회가 오면 그때부터가 삶이 바뀌는 시작점에 서게 된다. 바야흐로 유튜브와 소셜미디어에 초조함을 부추기는 콘텐츠가 널린 시대다. 운 좋게 일확천금을 한 이들은 성실한 삶을 비웃으며 과소비로 으스댄다. 이럴 때일수록 꾸준함의 가치는 되레 올라간다. 초조함에 빠져 헛발질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꾸준한 사람들은 더 빛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