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는 자기 연구가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걸 잊으면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 2014년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기소됐을 무렵, 라디오에서 한 진보 인사가 이런 말을 했다. 학문의 자유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적 발언이었다. 놀라운 발언이라 택시 안에서 메모를 해뒀다. 더 놀라운 것은 출연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형사처벌은 과하다” 정도의 반박만 기억에 남는다.

2013년 ‘제국의 위안부’가 배달된 날, 단숨에 읽었다. 역사학자가 아닌 일문과 교수가 쓴 책은 조선뿐 아니라 일본, 동남아, 네덜란드까지 너르게 다루며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국가 권력과 자본, 그 속의 여성을 다뤘다. 페미니즘적 시각이었다. 아플 만큼 직설적인 부분도 많았다.

일본 패망 후 중국 송산에서 발견된 일본군 위안부의 모습. 패망한 일본군들이 자결하기 직전, 이들은 도주해 살아남았다. 미국 자료다. /조선DB

책은 여러 언론사 인터뷰를 비교해가며 위안부 생존자의 증언이 해마다 달라지는 점도 지적했다. 위안부가 됐다는 나이는 점점 어려졌고, 처음에는 ‘돈을 번다고 해서 갔다’고 했다가 몇 차례 인터뷰 후에는 ‘어느 날 갑자기 끌려 갔다’로 변해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거짓말쟁이라고, 자발적 매춘부라고 비난한 게 결코 아니다. 먼 과거를 기술하는 피해자의 증언은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트라우마, 노화, 정치적 입장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박유하는 개인 진술의 한계를 넘어 사료를 통해 전쟁범죄인 일본의 ‘위안부 동원’ 체제를 분석했다.

식민지의 못난 아비는 ‘가서 돈 벌어 오라’며 딸의 등을 떠밀기도 했고, 동네의 먼 친척은 순진한 여성을 꼬여냈다. 물론 강제로 끌려가다시피한 소녀도, 돈 벌러 간 과년한 여성도 있었다. 나라가 멀쩡하면 일어났을 일이 아니다. ‘강요된 자발성’은 식민지배가 엄연한 일상의 폭력이 되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일본이 책임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 발간 후인 2013년 11월 30일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찍은 기념 사진. 박 교수는 "정대협 측과 다른 입장인 할머니들 말씀을 녹음한 후 정대협의 공격이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박유하 페이스북

놀랍게도 할머니들을 돕는 ‘의로운’ 집단 ‘정대협’이 이 문제에 사생결단하고 싸움을 걸었다. 문장을 발췌해 앞뒤를 잘라버리고, 박유하를 ‘매국노’로 만들었다. 그 무렵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초기 위안부 연구를 했던 다양한 남녀 학자들이 밀려나고, 정대협이 어느 새 몇몇이 장악한 ‘프렌드 비즈니스’가 된 것은 아닌가. 박유하를 공격한 뒤로 위안부라는 키워드는 ‘소녀상’이라는 우상을 통해 감성적으로 더더욱 확산되고, 더 큰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사업으로 치면 굉장히 잘한 마케팅이다. ‘피고인 박유하’는 법정을 오가며 정년퇴직했고, 국회의원이 된 윤미향 역시 횡령 사건 피고인이 됐다.

공직 후보가 생방송으로 거짓말을 해도 “질문에 답하는, 즉흥적 거짓말은 거짓말로 볼 수 없다”며 무죄 판결이 나오는 나라다. 가짜 뉴스를 일삼아 찍어내는 매체를 압수수색해도 “언론에 재갈을 물린다”고 난리 나는 나라다. ‘거짓말할 자유’까지 보장하지만, ‘친일’ 딱지가 붙으면 생매장된다. 오로지 좌파가 그 감별사다.

박유하의 책이 훌륭한 연구서는 아니다. ‘(위안부의 역할은) 성적 위무를 포함한 고향의 역할이었다’ 식의 문장은 성 착취를 ‘애수’로 포장해 삼키기 불편했다.

그럼에도, 정대협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윤미향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학자를 겁박하는 건, 전체주의적 폭력이다. 태극기 부대가 아니라 이런 게 ‘극우’ 혹은 ‘극좌’다. 그 폭력을 같은 교수들도, 학자들도, 언론도 못 본 척했다. 박유하를 때리는 몽둥이가 자신을 향할까 겁냈다. 기자도 그 비겁한 무리에 있었다. 대법원은 26일 박유하에 대한 원심판결(명예훼손 혐의 벌금 1000만원)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주심 노정희 대법관은 대표적 진보 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