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저널리스트 도이 도시쿠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의 일생을 추적한 책 ‘기억과 살다’에는 매우 논쟁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도야마의 군수 공장을 탈출한 자신을 붙잡아 강간한 뒤 군 위안소로 끌고 간 고바야시 헌병에 대한 강덕경의 증언이다. 고바야시는 15세 소녀를 지옥 구덩이로 던져 넣은 악마지만, “가끔 주먹밥과 건빵을 갖다주고 뱃놀이도 데려가 준 사람이었다”고 강덕경은 회고한다. “고바야시에게서만 그런 일을 당했다면 위안부로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가해자를 향한 증오와 애착의 공존에 저자는 범죄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한다. 매 맞는 아내가 남편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듯, 물리적·심리적 감금 상태에 있던 위안부들은 생사여탈권을 쥔 일본군이 사소한 자비를 베풀 때 과도한 애착과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의 해석은 달랐다. 그는 강덕경 같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 군인에게 느낀 감정이 ‘사랑’ 또는 ‘동지애’일 수 있다고 해서 논란을 불렀다. 황국신민으로 애국자 역할도 담당해야 했던 조선인 위안부에겐 일본군과의 동지적 관계가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고, 일본군을 간호하고 사랑하고 함께 웃던 기억을 은폐하는 건 그들을 또 한번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박유하의 문제적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사법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책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분노하게 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루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여성들에게 ‘동지애’란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이는 여성 폭력에 대한 무지이자, 피해자가 아닌 ‘제국의 시각’에서 위안부를 바라본 ‘인간에 대한 몰이해’다.
일본의 국가적 책임 유무를 결정하는 두 요소 ‘강제 연행’과 ‘위안소의 매춘적 성격’에 대해서도 박 교수는, 여성을 직접 끌고 간 주체는 포주나 업자이지 일본군이었던 경우는 적어 국가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매춘적 강간’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통해 매춘을 목적으로 한 조선인 위안부도 적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군 위안부 제도는 그것이 강제 연행이든 사기든, 성폭력이든 성매매든, 일본군과 사랑을 했든 안 했든, 국가 조직인 군대가 여성에게 가한 명백한 폭력이다. 군 당국과 행정기관의 비호와 묵인 없이 위안부 동원이 불가능했다는 건 일본 학자들도 동의하는 바다. 박유하가 주요 근거로 삼은 센다 가코의 책 ‘종군 위안부’조차 ‘군의 명령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가 제1선 장병들의 성욕 처리 용구로 이용됐던 여성’으로 위안부를 정의한다. ‘제국의 위안부’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윤명숙의 일본 박사 학위 저술 ‘조선인 군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언이 빼곡하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는 과도한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위안부 담론을 독점한 채 일본 정부에 강경 일변도로 대응해 온 정대협(정의연)의 운동 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일본 정부가 왜 그토록 법적 배상 책임을 거부하는지도 소상히 밝힌다.
문제는 박 교수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썼다”는 이 책이 아베 정권과 일본 극우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조차 “매춘이 자랑이냐” “가짜 위안부 색출하라”는 모욕과 멸시가 쏟아졌고, 좌파와 정의연은 이를 반일 선동에 이용했다. 박 교수는 “좌우 모두 내 책을 오독했다”고 했지만, 누구를 위한 화해인지 오독하게끔 글을 쓴 건 저자의 책임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30년이 흘렀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일차적 책임은 정의연의 독주를 수수방관한 정부에 있다. 박근혜 정부가 아베 정권과 우여곡절 끝에 타결한 합의마저 문재인 정부가 휴지 조각으로 만든 뒤로는 단 한 걸음의 진전도 없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챙겼다”는 이용수의 분노처럼 한일 양국 간 협상에서도, 정의연과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도 할머니들은 언제고 소외됐다.
이제라도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일본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는 주장에 분노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했던 강덕경은 “일본 정부가 진상을 밝혀준다면 배상을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대구에서 만난 이용수 할머니는 “돈을 바라는 게 아니라 죽기 전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외교로 풀어야 한다. 일본 총리가 고개 숙여 할머니들 손을 잡아드리는 일이 그 첫걸음이다. 그건 대통령과 정부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