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12회>
어느 권문세족의 노비 상속문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갈 수 있다면, 그 옛날의 실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는 없을 듯하다. 우리 스스로 현재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살면서도 이 세상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언제 어디서든 현실은 복잡하고 인간사의 진실은 켜켜이 깔린 무지와 은폐의 장막에 가리어져 있다. 작은 범죄 하나의 진실을 밝히려 해도 수개월이나 수년이 걸리고, 때론 수십 년이 지나도 실상이 드러나지 않는 미제(未濟) 사건이 수두룩하다.
외국에 가서 주마간산으로 관광지를 둘러봐도 그 나라에 대해 제대로 알 순 없다. 언젠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다고 해도 과거사의 실상을 밝히려면 결국 힘겨운 진실 탐구의 과정을 거쳐 가야만 한다. 역사·지리학자 로웬털(David Lawenthal)의 책 제목처럼 “과거는 낯선 나라이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 과거사의 실상을 밝히려면 중요한 자료를 찾아내서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밖에 없다. 가령 15세기 말 조선의 한 가문이 제작한 아래 문서와 같은······.
세로 길이 89cm에 가로 길이가 4.47미터로 188항에 달하는 이 커다란 문서에는 767명의 역사적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 9명은 양반가 남매들이고 나머지 758명은 그들이 상속한 집안의 노비들이다. 그 아홉 남매는 1460년 임금 앞에서 치르는 전시(殿試)에서 명경과(明經科)에 장원급제한 재령(載寧) 이씨(李氏) 이맹현(李孟賢, 1436-1487)의 일곱 아들과 두 딸이다.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총애를 받은 이맹현은 이조참판을 지낸 걸출한 인물로 훈척(勳戚) 가문 윤곤(尹坤, ?-1422)의 증손녀와 혼인하여 처가에서 큰 재산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제아무리 떵떵거리는 권문세족이라 해도 15세기 말엽 조선에서 한 집안이 무려 758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심히 의아스럽다. 19세기 미국 남부 목화 플랜테이션에서 부리는 노예 수는 평균 잡아 50명 안쪽이었다. 수백 명 노예를 부리는 농장도 없지 않았지만, 극소수였다. 당시 미국에서 생산된 면화는 75%가 무역 항로를 타고 전 세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860년대 미국 남부에서 생산된 면화는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면화의 3분의 2에 달했다. 당시 미국 남부는 세계시장을 가진 근대 상업경제의 허브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예주는 50명 이하의 노예만 부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정부 집계로 온 나라 전 인구가 고작 3~4백만 명(1519년 374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15세기 말 조선에서 과연 어떻게 한 집안이 758명의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을까? 이 난해하고도 중요한 질문에 대해선 연구자들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다. 이 큰 질문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 이 문서에 등장하는 노비들이 과연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우선 살펴보자.
문서에 등장하는 노비들은 누구인가?
형제자매들이 모여서 윗대에서 물려받은 재산을 배분하는 분재기(分財記)는 정부의 공증을 받아서 법적 효력을 발휘했던 중요한 재산 문서이다. 그 당시 재산이라 하면 크게 가옥, 전답, 노비, 가축, 농기구, 가사 도구 등등을 꼽을 수 있다. 이 문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노비에 관련되는 노비안(奴婢案)이다.
아홉 남매를 대신하여 붓을 들고 직접 이 문서를 쓴 이른바 “필집(筆執)”의 역할은 이맹현의 사위이자 장녀의 남편 윤화명(尹化溟)이 맡았다. 그는 종8품 벼슬인 부사맹(副司猛)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 집안 큰사위로 그 역시 실질적인 상속의 수혜자이지만 관료로서의 그의 이력이 문서에 대한 법적 신빙성을 높여 준다.
이 문서를 보면 빽빽하게 해서체(楷書體)의 한자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나 그 당시 관아에서 주로 쓰는 이두(吏讀/吏頭)로 기술되어 있어 한자를 아는 한국인이면 기초 수업만 몇 시간 들어도 어렵잖게 읽어낼 수 있다. 이 문서 앞부분에 상투적인 법률 문구 몇 줄이 있을 뿐, 나머지는 소유권을 밝히기 위한 노비 목록에 불과하다.
아홉 남매가 서로 나눠 가진 노비의 수를 보면 장남이 108구(口, 노비 세는 단위), 차남 88구, 장녀 84구, 3남 79구, 4남 82구, 5남 79구, 차녀 78구, 6남 82구, 7남 78구이다. 장남이 스무 구쯤 더 받았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 남녀 균분의 관례를 따랐다고 볼 수 있다. 문서에는 노비들의 이름자 말고도 그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지역이 기재되어 있다. 놀랍게도 그 노비들은 전국 전역 “조선 팔도”의 72개 읍(邑)에 흩어져 있다.
문서를 직접 읽어가며 9남매들 사이에서 분배되는 노비들의 이름과 연령과 모계(母系) 등 신원 정보를 하나하나 확인하다 보면,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서 1494년 당시 조선 땅 어디에선가 타인의 소유물로 등재된 채 살아가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내가 태어나 자라난 그 땅에서 일상적으로 보았던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주 대하는 느낌이랄까. 언젠가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친 듯한 데자뷔(déjà vu, 기시감) 같은······.
일례로 공조(工曹) 좌랑(佐郞)의 벼슬을 지냈던 장남 이상(李瑺) 몫(衿)의 노비들을 살펴보자. 맨 앞에 함안(咸安) 살던 계집종 도리장(道里莊)이 여섯째로 낳았다는 여든한 살의 늙은 비(婢, 계집종) 안금(內隱今)이가 맨 먼저 등장하고, 그 뒤를 안금이의 셋째인 아들 강만(姜萬, 쉰 살)이와 넷째(본문에는 셋째로 기입)인 딸 자근더기(小斤德, 마흔네 살)가 따른다. 이어서 자근더기의 둘째인 딸 길더기(吉德, 스물두 살)와 셋째인 아들 정산(丁山, 열여덟 살)과 넷째인 연비(燕非, 열다섯 살)가 등장한다. 그다음 스물두 살 길더기의 첫딸인 세 살배기 동더기(同德)가 나온다.
이 집안에 내려온 노비들의 혈통을 모계로 추적해 보면, 도리장은 안금이를 낳고, 안금이는 자근더기를 낳고, 자근더기는 길더기를 낳고, 길더기는 동더기를 낳았다. 도리장→안금이→자근더기→길더기→동더기, 다섯 세대 줄줄이 이어지는 천비(賤婢)들의 종살이 계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편 안금이는 도리장이 생산한 여섯 번째 자식이다. 다시 말해 도리장은 안금이를 낳기 전에 이미 다섯 자식이 있었다. 그 다섯 명도 천출로 종살이를 면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지만, 이 문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안금이가 그해 여든한 살이었으니 나머지는 모두 죽지 않았을까 싶은데, 각자 다른 집안 종살이를 했을 수 있다.
사내종들은 옆집 계집종 말고 양녀를 취해야
농부에겐 새끼를 낳는 암소가 수소보다 더 큰 가치가 있듯, 노주(奴主)에겐 노비를 생산할 수 있는 계집종이 사내종보다 더 중했다. 노주 입장에서 사내종이 타인 소유가 아닌 양녀(良女)를 취(娶)해 자식을 낳으면 주인의 재산이 불어나지만, 옆집 계집종과 눈이 맞으면 그만큼 큰 손실이었다. 물론 노주는 어떻게든 사내종과 옆집 계집종의 로맨스를 막으려 했다.
사내종이 다른 집 계집종을 사랑하여 아내로 삼고자 하면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를 보면, 자기 집 사내종 네 명이 다른 집 계집종과 혼인하자 네 명 모두 처벌하고, 그중 한 명에겐 재산을 바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노비가 재산을 상전에 바치는 행위를 보통 기상(記上)이라 했다(권내현,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역사비평사, 2014).
15세기 조선 조정은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자식은 부모 일방의 천한 신분을 물려받는 종천법(從賤法)을 시행했다. 그 법에 따라서 사내종이 양녀(良女)와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모두 주인의 재산으로 등록되었다. 실제로 한 사내종은 다섯 아들 모두 양녀와 혼인시켜서 숱한 노비를 낳아 주인의 재산을 불려주고는 그 공을 인정받아 주인에게서 노역을 면제받은 사례도 있었다. 종천법은 노주의 이익에 복무하는 최악의 신분법이었지만, 바로 그 법의 시행 결과 조선의 노비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이애 남매 화회문기”에도 이 집안의 사내종들이 양녀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기록이 상당수 발견된다. 장남 이상이 물려받은 108구 노비 중에서 14구가 그 집안 사내종이 양녀와 결혼하여 낳은 이른바 양처(良妻) 소생의 노비다. 차남 이위(李瑋)가 물려받은 88구의 노비 중 17구, 장녀 이씨가 받은 84구 노비 중 17구, 3남 이래(李琜)가 받은 79구의 노비 중 17구가 사내종의 양처 소생 노비들이다.
이러한 사례로 미루어 당시 노주들이 재산 증식을 위해 사내종과 양녀의 결혼을 장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가문 장남이 상속한 노비 목록을 보면, 강진의 계집종 효도(孝道)가 낳은 셋째 사내종 막금(莫金, 쉰일곱 살)이와 그가 양녀를 취해서 낳은 넷째 사내종 강수(姜守, 아홉 살)가 함께 들어가 있다.
장녀가 상속한 노비 목록엔 사내종이 대를 이어 양녀를 취하는 사례도 보인다. 함경도 안변(安邊, 현재 강원도)의 사내종 막지(莫只)는 양녀를 취하여 첫째 사내종 은정(銀丁)을 낳았고, 은정 역시 양녀와 혼인하여 둘째 사내종 귀진(貴珍)을 낳았다. 이 문서 작성 시 은정은 서른아홉 살, 귀진은 다섯 살이었다. 아울러 사내종 막지가 낳은 다섯째 계집종 신금(新今)이도 함께 상속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어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같은 비에게서 태어났다고 볼 수도 있고, 막지가 다른 양녀를 둘째 처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사내종이 양녀를 취해 낳아 기른 사내종이 다시 양녀를 취해서 사내종을 낳음으로써 3대가 대를 이어 한 주인에게 부역하면서 그 집안 재산을 늘려주었음이 확인된다.
타인의 재산 목록에 올라간 아이들
이 문서에 올라간 758명 중에는 이름을 얻지 못한 노비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 네 살 이하의 영유아들이다. 아래 이미지의 붉은 네모 안을 보면 노(奴)나 비(卑)자 아래 이름자 대신 빈칸이 있고, 그 아래로 “네 살(年四),” “두 살(年二),” “한 살(年一),” “한 살(年一)”이라 적혀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서 전체를 보면 대략 스무 명 넘는 무명의 영유아가 노비안에 올라 있다. 그 지역적 분포는 경기, 강원도, 함경도, 전라도 등 다양하다.
예컨대, 전라도 임실(任實) 계집종 용더기(龍德)의 첫째 자식 네 살배기 아들, 임실의 계집종 분가(粉加)의 둘째 자식 두 살배기 딸, 강원도 강릉(江陵府) 우계(羽溪)현의 계집종 안금이의 둘째 자식 세 살배기 딸, 황해도 봉산(鳳山)의 서른 살 계집종 돗가(都叱加)의 둘째 자식 여섯 살 난 딸, 경상도 칠곡부(漆谷府) 팔거(八莒)의 노비 최산(崔山)이 양처를 얻어 낳은 셋째 자식 한 살배기 아들 등이 장남 이상의 재산으로 올라가 있다. 아직 영유아의 이름까지는 다 기록하지 못했지만, 이 집안에서 전국에 흩어져 살며 그 집안 노비들이 생산한 갓난아이의 존재까지 훤히 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문서에 기록된 아기 노비들은 신분제의 굴레에 묶여 죽도록 노비로 살아갔던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었다. 그 점은 의심의 여지 없는 견고한 사실(hard fact)이다. 이름이 없어 남겨둔 노(奴)나 비(婢)자 뒤의 빈칸 하나하나가 실은 그들 한 명, 한 명이 이 땅에 살다 갔음을 알려주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다.
그 빈칸들을 뚫어지게 한참 바라보는데 내 귓가에 갓난아기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만약 내 자식들이 출생 직후 국민이 아니라 노비로서 내 상전의 재산 목록에 기재돼야 한다면······. 그러한 거친 상상만으로도 살갗이 돋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 무명의 노비들은 그 당시의 현실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관해 많은 점을 암시한다. 우선 15세기 후반 재령 이씨 명문가의 노비 관리가 상당히 철저했음을 보여준다. 수백 리 떨어져 사는 집안 노비들이 자식을 낳을 때마다 노주는 노비안을 갱신하며 재산의 증감을 기록했다는 얘기다. 그 모습은 마치 정부가 세금 징수를 위해서 실시하는 정기적 인구조사를 연상시킨다. 축산농가에서 갓 태어난 송아지를 챙기는 모습도 떠오른다.
한 살배기든, 두 살배기든 모두 그 집안의 소유물이란 점을 상기하면, 당연한 처사라 할 수 있다. 노비안에 등장하는 상투적인 문구처럼 그 모든 노비는 그 집안에서 “자자손손 전해 받아서 가지고 마음껏 사용할(子孫傳持鎭長使用爲齊)” 재산이었다. 법률 용어로 정의하자면 노비는 그들의 동산(動産, chattel property)이었다. 쉽게 말하면, 평생 부려 먹을 그들의 종이며, 하인이며, 노예들이었다. 당연히 샅샅이 조사해서 노비안에 정확하게 그 존재를 기록해 놔야만 했다. 그래야만 나중에 “분쟁을 당하는 일이 있다면 관아에 고해서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 즉(爭望隅有去等, 告官辨正爲乎).”
설사 주인이 갓난쟁이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사내종이나 계집종의 어미, 할미, 증조 할미, 고조 할미로 이어지는 혈통의 모계 정보만 꽉 쥐고 있으면, 해당 노비는 꼼짝없이 한평생 신공을 바치거나 노역을 져야만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노비안 작성 시 어미가 비(婢)인 경우엔 따로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적지 않았다. 노(奴)가 양처를 취해 낳은 아이일 경우에만 아비의 이름자를 밝혔다. 어미가 비(婢)라면 자식은 100%로 노비가 되므로 아비를 따로 기재할 필요는 없다. 반면 어미가 양녀 신분일 경우엔 아비가 노주의 사내종이란 사실을 분명히 기재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 자식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록 방식은 노주의 소유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한 치밀한 장치다.
일천즉천의 사회사,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갓난아기가 이름도 없이 노비안에 바로 올라갔던 당시의 현실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일부 연구자들은 남녀 균등 상속 원칙을 보이는 조선 초기의 양반가 분재기를 “공정과 합리의 장”이라 칭송하지만, 역사의 실상은 정치적 수사나 이념적 미사여구로는 절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지난 회에서 이미 밝혔듯, 세계사적 견지에서 평가하자면, 조선의 종천법은 3천 500여 년 전 구(舊) 바빌로니아의 관습법보다도 비할 바 없이 더 가혹했다. 자유와 인권의 관점에서 조선의 종천법은 비인간적인 노예제의 악법이었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섣불리 포폄(褒貶)의 잣대를 휘두르면 단순화의 오류에 빠진다. 평가 이전에 우선 조선 노비의 생활상을 깊이 탐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민족의식에 사로잡혀 조선의 노비제까지 옹호한다면, 시대착오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요즘 연구자들은 “오늘의 가치로 과거를 평가하지 말라”는 역사적 상대주의의 금언에 따라 웬만해선 조선 노비제의 잔혹함을 연구하지도, 비판하지 않는다. 나아가 교묘한 언어와 그럴싸한 이론으로 은근히 그 제도를 옹호하고 미화하려는 풍조도 보인다.
반면 17세기 조선의 개혁사상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종천법의 잔인함을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일갈했다. “노비는 인류(人類)임에도 금수로 취급하니 어찌 법이라 하겠는가?(人類而處以禽獸, 豈法也哉!)” 유형원은 주자학(朱子學)의 영향 속에서 자라나 유가 경전을 참조하며 경세(經世)의 방책과 치국(治國)의 대안을 모색했던 조선의 유생이었다. 15~16세기 조선 유생들은 왜 유형원처럼 노비제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할 수 없었을까? 노비를 같은 인류라 믿었던 유형원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진정 노비를 짐승이라 여겼음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