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지난 3월 일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 ‘제3자 변제’ 해법을 밝힌 지 8개월이 지났다. 윤 대통령의 결단은 2018년 10월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 이후 악화된 한일 관계를 단숨에 개선시켰다. 8월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한미일 3국 협력 선언’을 낳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제3자 변제안이 한일 화해의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비교적 높은 평가를 내리지만, 국내적으로는 찬반 논란이 여전하다. 지난달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일본의 겐론(言論) NPO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제3자 변제안은 한국에서 ‘긍정 평가 28.4%, 부정 평가 34.1%, 어느 쪽도 아니다 29.7%’였다. 일본에서는 ‘긍정 평가 34.2%, 부정 평가 16.7%, 어느 쪽도 아니다 17.1%’였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이달까지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받은 강제동원 피해자 15명 중 11명에게 판결금과 지연 이자를 지급했다. 73%의 원고가 제3자 변제안을 수용한 것이다. 이 중에는 생존자도 1명 포함돼 있는데 그는 대법원에 계류 중인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한 특허권 특별현금화명령도 취하했다.
원고 1명당 배상금과 5년간 지연 이자를 포함, 2억3000만~3억1000만원씩 수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원(財源)은 1965년 한일 협정으로 도움을 받은 포스코가 기부한 40억원을 바탕으로 했다.
원고 15명 중에서 생존자 2명을 포함한 4명이 배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피해자지원재단은 생존자와 사망한 2명의 유족 10명의 거주지 법원 12곳에 배상금을 공탁하려 했다. 그러나 법원 공탁관들이 ‘채권자의 의사에 반해 제3자가 변제할 수 없다’는 민법 제469조를 근거로 공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피해자들이 받으려는 의사가 없는데 제3자가 공탁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해자지원재단은 민법 487조 “채권자가 변제를 받지 아니하거나 받을 수 없는 때는 변제의 목적물을 공탁할 수 있다”는 조항을 근거로 “공탁관의 재량을 벗어났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의 1심에서 피해자재단이 패소, 2심이 현재 진행 중이다. 정부 변제안에 반대하는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정부의 공탁 이의신청에 대한 법원의 기각은 사실상 윤석열 정부의 강제 동원 제3자 변제에 대한 파산 선고”라고 주장한다. 법원 안팎에서는 이 문제도 대법원에서 최종 결정이 날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의 ‘제3자 변제’ 결단의 완전한 성공을 포함, 앞으로의 한일 관계도 대법원에 달렸다는 관측이 나온다.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징용 피해자들에게 6000억원을 보상한 2005년 민관위원회 결정을 무시한 징용 배상 판결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일본과는 달리 정부의 결정에 적극 개입하는 ‘사법 적극주의’ 여파였는데, 이 같은 기조가 계속된다면 한일 관계가 다시 악화될 소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을 거부한 원고 4명은 대법원에 신속하게 ‘특별현금화 명령’을 내려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대법원의 배상 판결 후, 피고 기업이 배상에 응하지 않자 원고인 이춘식 할아버지는 일본 제철 주식을 압류하고, 양금덕 할머니 등 3명은 미쓰비시 상표권과 특허권을 압류했다. 그래도 피고 기업이 응하지 않자 압류 명령에 따른 특별현금화명령을 신청했다.
법원은 2021년 9월 미쓰비시의 국내 압류 재산에 대해 매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미쓰비시가 이에 불복해 항고에 이어 재항고, 이 사건은 2022년 4월부터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대법원이 정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비판하며 하루속히 현금화 명령이 내려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한 사건과 유사한 징용 배상 소송도 전국에서 약 80건 진행 중이다. 1~3심에 계류 중인 사건의 원고는 약 1200명이다. 정부에서는 이 중에서 약 200~300명이 증거를 모두 갖춰 승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난 9일에도 징용 피해자 정신영 할머니가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정 할머니가 직접 참석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가 진심 어린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14세 때 동해를 건너 미쓰비시의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일했다고 한다.
징용 배상 문제에 밝은 한 전문가는 “원고 4명에 대한 배상금 공탁이 끝내 이뤄지지 않고, 피고 기업 자산의 현금화 명령도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 한일 관계는 다시 악화될 수 있다”며 “이 경우 국민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특별법을 만들거나 다른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고 기업, 내년 총선 전에는 안 움직일 것”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제3자 변제안’의 성공과 한일 관계의 안정적 발전은 우리 측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 시민사회, 피고 기업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현재까지 일본의 반응은 우리의 기대에는 미흡하다는 평가가 많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5월 서울을 방문,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향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같은 달 히로시마 G7 회의 때 윤 대통령과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한 것이 사실상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입장 표명의 전부다.
지난 3월 박진 외교부 장관은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면서 일본 기업의 참여와 관련, “물컵에 비유하면 물의 절반이 찼다고 생각한다”며 “일본의 호응에 따라 나머지 물컵이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는데 물컵이 아직 채워지지 않고 있다.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이 한경협과 함께 미래 파트너십 기금에 10억원씩 내놓은 것 외에는 큰 움직임이 없다. 특히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 두 피고 기업은 아직까지 참여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일본의 한 소식통은 “일본에서도 윤 대통령의 제3자 변제안에 호응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지만, 두 기업은 여전히 내부 논의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본 내에서 “원래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된 문제를 한국이 다시 제기해 문제를 만들었다가 한국이 해결했는데 왜 일본이 나서야 하느냐”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피고 기업이 호응하더라도 내년 4월 총선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일본 기업들이 윤 대통령과 여당의 승리를 지원하려고 총선 전에 돈을 냈다”는 논란에 휩싸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소극적 대응은 아베 신조 총리 이후 쉽게 변화하기가 힘들다”면서도 “하지만 한일이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야 하기에 피고 기업을 포함한 일본 사회가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