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의 조선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전설적 지도자였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경력과 미국에서 수행한 독립운동은 그의 명성을 한껏 높였다. 그래서 해방 뒤에 나온 모든 정당이 그를 지도자로 받들었다.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도 주석에 아직 귀국하지도 않은 이승만을 올렸다. 덕분에 이승만은 가장 큰 추종 세력을 이끌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이승만 서거 후 프란체스카 여사 만난 박정희 - 이승만 서거 후 한국으로 돌아온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의 경제정책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승만이 추진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에 바탕을 두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승만의 실질적 후계자는 박정희였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자연히, 당시 남한 정계의 관심은 이승만의 후계자 자리로 쏠렸다. 명망으로 따지면, 어려운 시절에 임시정부를 이끈 김구가 후계자로 가장 유력했다. 그러나 그의 집권엔 두 가지 난제가 있었다. 하나는 나이였다. 그는 이승만보다 한 살 아래였고 이미 69세였다. 그로선 이승만 다음에 집권한다는 각본을 따를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해외파 임정 요인들이 국내에 뿌리가 없었다는 사정이었다. 김구를 지지하는 우익 세력은 이미 국내파 민족 지도자들의 정당인 한국민주당이 장악한 터였다.

마침 모스크바 삼국외상회의가 한반도를 신탁통치 아래 둔다고 결정해서,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김구는 반탁운동을 통해서 임시정부가 미군정청에서 권력을 단숨에 빼앗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1945년 12월 31일에 서울에 뿌린 임시정부의 포고문은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하게 함”이라고 선언했다. 실제로 많은 군정청 직원이 포고문을 따라 임시정부에 충성을 서약했다.

이런 움직임은 당연히 미군정청의 강경한 대응을 불렀다.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김구를 불러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온다고 서약하고서 약속을 어겼다’고 질책했다. 그리고 그들을 인천의 수용소에 수감한 뒤 중국으로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군정청의 이런 반응에 김구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실책으로 김구는 남한에서 움직일 정치적 공간을 많이 잃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해 잘 아는 그가 성공할 수 없는 ‘남북 협상’에 매달린 것은 이런 사정에서 연유했다.

이승만, 김구와 함께 해외파 우익 지도자로 꼽힌 김규식은 이승만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그는 재능이 이승만에 버금갔지만, 행적이 어지러웠다. 1923년에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 정부를 세우자고 나섰을 때, 김규식은 그들의 명목상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쫓겨났다. 그런 경력 때문에, 그는 임시정부의 주류가 세운 한국독립당에선 추종자가 없었다.

박정희가 보낸 꽃바구니 받은 이승만 - 1961년 11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보낸 꽃바구니를 전달받고 있는 이승만. 그 오른쪽은 박 의장의 의전비서관 조상호.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좌우 합작’을 추진하면서, 하지는 김규식과 여운형을 발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추종 세력이 약해서 좌우 합작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하지가 이승만을 밀어내는 데 실패하자, 좌우 합작은 막을 내렸고 김규식의 정치적 꿈도 스러졌다.

국내파 지도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송진우였다. 1930년대에 동아일보 사장으로 활약하면서, 그는 이광수와 함께 단군, 세종, 이순신 삼성(三聖)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 사업의 하나로 이광수의 전기 소설 ‘이순신’이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이어 농촌 지역에서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을 벌여 한글을 보급했다. 압제적 일본의 통치 아래서 이런 민족적 사업을 벌인 것은 송진우의 인품과 경륜을 잘 보여준다. 그는 뜻이 굳으면서도 현실적 제약을 늘 인식하고 가능한 목표를 추구했다.

1945년 12월 29일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주재로 신탁통치 반대 대책을 논의했다. 이어진 확대 회의에서 “우리 임시정부에 즉시 주권 행사를 간망(懇望)할 것”이라는 결의가 통과되었다. 그런 결의는 미군정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송진우는 그런 결의가 품은 중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장했다. 놀랍지 않게도, 그는 비난과 오해를 받았다.

이 회의를 마치고 자정 지나 집에 돌아온 송진우는 이른 아침에 한국독립당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김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송진우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송진우는 국내파 지도자들의 중심 인물이었고 미군정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한국민주당의 지도자였다. 우익인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은 지지 기반이 겹쳤으므로, 국내 기반이 없는 한국독립당이 뿌리를 내리려면 한국민주당을 밀어내야 했다.

송진우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승만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비보에 경악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픔과 걱정을 만시(輓詩)를 지으면서 달랬다.


義人自古席終稀(의인은 예부터 자리에 누워 죽는 일이 드물고)

一死尋常視若歸(한번 죽음을 심상히 여겨 집으로 돌아가듯 한다)

擧國悲傷妻子哭(온 나라 슬픔에 젖고 처자는 소리 내어 우는데)

臘天憂里雪霏霏(섣달 하늘 망우리에 눈만 푸슬푸슬 내린다)


두 해 뒤 김구는 한국민주당의 실질적 지도자 장덕수를 암살했다. 장덕수가 이승만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을 연결하는 고리였으므로, 장덕수의 죽음은 이승만에겐 큰 불행이었다. 장덕수가 살았다면, 이 대통령이 이기붕을 후계자로 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거듭된 암살은 김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송진우의 암살은 미군정청이 제대로 수사할 능력이 없었다. 장덕수의 암살은 미군정청 검찰이 제대로 수사했고, 김구는 법정에 불려 나가 피의자로 심문을 받았다. 이 일로 김구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송진우와 장덕수가 갑자기 죽자, 한국민주당은 내세울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추종자들이 적었던 신익희가 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선거 유세 중 서거했다. 다음 대통령 선거에선 조병옥이 야당 후보로 나섰지만, 신익희처럼 선거일 직전에 병사했다.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내각책임제로 바뀌고 민주당의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혁명을 겪은 터라, 사회는 응집력이 약해졌고 집단적 시위가 잇따랐다. 집권한 민주당까지 신파와 구파로 분열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이런 상황에 허약한 장면 정권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마침내 1961년 5월에 5·16 군부 정변이 일어났다. 미국은 장면을 다른 지도자들보다 선호했으므로, 주한 미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대장은 박정희 소장이 이끈 반란군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장면 총리를 찾을 수 없었다. 장 총리는 수녀원에 숨어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5·16 군부 정변이 성공했다.

장면 정권은 9개월 동안 존속했다. 그 짧은 기간에 세 차례나 개각했다는 사실이 가리키듯, 내각이 안정되지 못했고 뚜렷한 정책을 추진하지 못했다. 반면에 군부 정변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18년 동안 존속하면서 경이적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따라서 이승만의 실질적 후계자는 박정희였다.

후계자 박정희

1961년에 군부 정변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 박정희 소장은 나라를 다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집권 세력이 발표한 ‘혁명 공약’은 반공과 친미를 내세웠는데, 그것은 남로당원이었던 박정희의 전력을 고려한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구체적 정책은 없었다.

이력이 가리키듯, 박 대통령은 시장경제에 비판적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먼저 처리한 경제 법령이 ‘부정축재처리법’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이 확인된다. 이 점에서, 그는 시장경제를 확신한 이 대통령과 달랐다.

그러나 지도자로 나라를 이끌면서, 그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 특히 경제에서 차지하는 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업가들과 협력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전략을 따랐다. 그리고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정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경제정책은 이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추구한 경제정책을 충실히 본떴다. 그의 경제정책의 상징이 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이 대통령이 마련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에 바탕을 두었다.

박 대통령의 통치 아래서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이라 할 만큼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자, 그런 성취의 바탕을 놓은 이 대통령의 업적도 따라서 위대해졌다. 그런 뜻에서 박 대통령은 이 대통령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이런 관점에서 살필 때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박 대통령의 성취는 일본과 수교한 일이다. 그것은 무척 어려웠을 뿐 아니라 한국의 안전과 경제 발전에 긴요한 요소였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지고한 가치를 공유한 두 나라가 정치적으로 협력하고 경제적으로 보완함으로써, 두 나라는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 크게 기여했다.

다른 중요한 일과 마찬가지로, 한일 수교 협상도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시작해서 바탕을 마련했다. 1951년에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평화조약’(흔히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라 함)에 한국도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 제국의 영토 분할’로 생긴 국가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일본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밝혔다. 그래서 1951년 10월에 도쿄에서 첫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양측 입장이 너무 달라서 진전이 없었다.

어떤 뜻에선, 한국도 일본도 수교에 나설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52년 정초에 이 대통령은 홍진기 법무부 법무국장을 불렀다. 홍 국장은 한일 회담 대표단의 일원이었는데 국제법에 밝아서 어려운 문제 협상을 맡았다. 이 대통령은 난제들의 전망에 관해 듣더니, 홍 국장의 나이를 물었다. 그리고 간곡하게 당부했다. “이 나라는 자네들 나라야. 앞으로 한일 관계 역시 자네들 젊은이가 설계하고 발전시켜 나갈 일이야.” 그리고 자신과 같은 독립운동 세대가 이끄는 동안은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기 어려우리라고 전망했다.

대표단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회담을 시작했을 때, 이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포했다. 국제적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런 조치는 오직 이 대통령만이 생각해내고 실행할 수 있었다. 일본 사회는 경악했고 한국의 조치를 거세게 비난했다. 당연히, 회담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평화선’은 단기적으로는 일본 어선들의 남획을 막아 동해 어류 자원을 지키고 장기적으로는 일본과 벌일 협상에서 큰 패가 될 터였다.

박 대통령은 평화선을 협상의 패로 삼아 과감하고 끈질긴 외교로 일본의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합의가 어려운 문제들을 우회하는 전술로 두 나라는 마침내 1965년에 수교했다. 이 대통령에게 간곡한 당부를 들은 “젊은이” 홍 국장은 1917년생으로 박 대통령과 동갑이었다. 이 대통령의 예언대로, 젊은 세대가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한 셈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고 미리 ‘평화선’이라는 결정적 패를 마련한 이 대통령의 심모원려(深謀遠慮)에 누가 찬탄하지 않으랴.

고귀한 선택

이 대통령과 박 대통령은 대조적이다. 한 분은 독립운동가로 일생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고, 다른 분은 일본 제국의 장교로 젊은 시절을 살았다. 한 분은 세계적 반공 지도자였고, 다른 분은 한때나마 남로당 당원이었다. 다른 면에서도 두 지도자는 서로 상당히 달랐다.

그러나 중요한 국익이 걸린 상황에선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선뜻 버렸다는 점에선 두 분이 같았다. 이 대통령은 얄타 협정의 비밀 협약 폭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주장, 휴전 반대와 같은 일이 그런 고귀한 성품의 발로였다. 박 대통령은 한일 수교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파멸을 부를 수 있는 길로 망설임 없이 접어들었다. 당시 거의 모든 국민이 한일협정에 반대했다. 특히 학생들은 극렬하게 반대했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때 필자는 대학 2학년이었다. 단과대학의 100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과 교수들 가운데 한일 수교가 타당하며 학생들의 반대는 단견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원로 사회학자인 학장 한 분뿐이었다. 물론 학생들은 그분의 간곡한 호소를 듣지 않았다. 모두 나라를 구한다는 들뜬 마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시위가 오래 이어지면서, 한일협정 반대 운동은 차츰 정권 타도 운동으로 바뀌었고 야당 지도자들이 가세했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터라서, 박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실제로, 1964년 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이어진 반대 운동은 휴교령과 비상계엄령을 불렀다. 그래도 박 대통령은 한일협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누구도 일본과 맺은 좋은 관계가 한국의 안보와 경제의 바탕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못한다. 지난 정권 아래서 북한에 호의적인 세력이 ‘토착 왜구’라는 구호로 일본과 맺은 관계를 해치려 시도했지만, 박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 얼마나 고귀한 선택이었나 새삼 일깨워주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