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에만 14만명이 구속되던 시절이 있었다. 경북 김천시 인구만 한 숫자다. 먼 얘기가 아니라 1996년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법원이 수사 기록만 보고 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할 때여서 발부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해 영장 발부율이 92%였다. “구속이 남발된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이듬해 영장실질심사가 도입됐다. 판사가 피의자를 직접 신문해 영장 발부 여부를 정하는 것이다. 이 제도 도입 후 구속자 수가 1년 만에 11만명대로 줄었고 영장 발부율도 82%로 10%포인트가량 떨어졌다. 구속자 수는 2010년 3만명대로 줄더니 2021년부터는 2만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영장 발부율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검찰이 구속영장 청구 건수를 크게 줄인 것이다. 일단 구속부터 하고 보던 검찰 수사 관행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 도입 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다. 영장 발부·기각 기준이 너무 모호하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상 구속영장은 범죄가 어느 정도 소명되는 것을 전제로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도주·증거 인멸 우려가 있을 때 발부하게 돼 있다. 범죄의 중대성, 재범 위험성 등도 고려할 수 있지만 이는 참고 사항일 뿐이고 핵심은 도주·증거 인멸 우려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아직도 발부·기각의 근거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이 대표적이다. 검찰은 이 대표의 불법 대북 송금과 백현동 비리, 위증 교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이 위증 교사까지 포함한 것은 구속을 위한 ‘안전장치’ 같은 것이었다. 위증 교사는 대표적인 증거 인멸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선 위증을 한 사람이 혐의를 인정했고, 이 대표가 위증을 교사한 녹취록까지 나온 상태였다. 그런데 서울중앙지법 유창훈 영장전담판사는 “위증 교사 혐의가 소명됐다”면서도 영장을 기각했다. 위증 교사 증거가 확보돼 추가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럼 피의자에게 증거 인멸 우려가 있으려면 그에게 위증 교사를 한 증거가 없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검찰에선 “수사 잘하면 ‘증거가 확보돼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고 기각하고, 증거가 부족하면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기각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실제 피의자가 자백하면 자백했으니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고 영장을 기각하고, 부인하면 방어권 보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기각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이러니 ‘로또 영장’이란 말까지 나온다.
지난해 스토킹하던 동료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신당역 살인 사건’ 범인이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후 범행을 한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스토킹에 시달리던 이 사건 피해자는 두 차례 가해자를 고소했다. 경찰이 처음 신청한 구속영장을 판사는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 우려가 없다”며 기각했다. 경찰은 2차 고소 때는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영장을 신청하지 않았고, 결국 참극이 발생했다. 1차 고소 때 가해자는 주거가 일정했고, 혐의 내용을 인정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구속 기준만 놓고 보면 모든 것을 판사 탓이라고만 비난하기는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피해자 안전을 우선시해야 하는 스토킹 범죄의 특성을 판사가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해엔 같은 아파트에 사는 10대 여학생을 흉기로 위협해 납치하려 한 40대 남성에 대한 구속영장도 기각됐다. 법원은 “도주와 재범, 피해자에 대한 위해 우려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용의자는 피해자와 같은 공간에 살고 있고, 피해자가 언제든 다시 범행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판단이었다. 영장이 기각되자 피해자의 아버지는 “사지가 떨렸다”고 했다. 지난 7월에도 인천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30대 여성을 폭행한 전직 보디빌더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법원은 “도주·증거 인멸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지만 이 판단 역시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지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구속 사유에 대한 판단은 판사의 재량이다. 그렇다면 정말 법원엔 영장 발부·기각에 대한 자체 기준도 없는 것일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출신인 변호사에게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영장실질심사가 도입된 지 26년이 흘렀지만 구체적인 기준들이 전혀 쌓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기계적으로 발부·기각을 정하거나 앞뒤가 안 맞는 판단들이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법조인들이 이제는 ‘영장 항고제’를 도입할 때가 됐다고 말한다. 영장이 기각되면 검사가 항고·재항고를 통해 상급법원에서 영장을 다시 심사받는 제도다. 현재는 영장이 기각되면 검찰은 재청구만 할 수 있다. 하지만 재청구를 해도 같은 법원의 동료 판사가 재심사를 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장 기각·발부 사유를 간단히 몇 자 적고 끝낼 때가 많다 보니 구속 기준을 알 방법도 없고 그것이 어떤 체계로 남아 있지도 않다.
반면 영장 항고제를 도입해 1심 법원의 영장 기각에 대해 고등법원, 대법원의 판단을 받을 수 있게 되면 오류를 시정할 수 있고, 그런 판례를 통해 구속 기준을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민도 어떤 경우 구속이 되는지 예측할 수 있어 구태여 거물급 변호사를 찾아가 사건을 의뢰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과거 판사로 있으면서 영장실질심사 도입 실무 작업을 했던 황정근 변호사도 영장 항고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영장심사도 재판인데 구속 사유에 대한 대법원 판례가 없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도 “현행 영장 시스템에서 판사의 재량이 너무 크다”며 “어느 정도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영장 항고제’ 도입해 구속 기준 판례 쌓아야
영장 항고제는 검찰의 숙원 사업이다.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에서도 논의했고, 2010년과 2019년에도 영장 항고제 도입 내용이 담긴 법 개정안이 의원 입법으로 발의됐지만 무산됐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법원의 반발도 한몫했다.
법원은 영장 항고제가 수사 편의를 위한 제도라며 반대한다. 그런 측면이 없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이 제도가 도입될 경우 판사들 재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영장 전담 판사 출신 변호사도 “재량을 폭넓게 행사하던 판사들이 제약을 받기 때문에 반대하는 측면도 있다”며 “이 제도를 통해 구속을 둘러싼 불필요한 갈등과 사법 불신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면 한번 해볼 만하다”고 했다. 독일·일본 등도 영장 항고제와 유사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법원은 ‘조건부 영장제’가 먼저라고 주장한다. 구속영장 단계에서 주거 제한, 위치 추적 장치 부착 등 조건을 붙여 피의자를 석방하되 이를 어길 경우 구속하는 제도다. 발부·기각 양자택일밖에 없는 현행 제도에 ‘중간 지대’를 두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피의자의 방어권도 보장하고 다른 범죄 예방 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수사기관들이 구속에 목매는 관행이 바뀔 것이란 시각도 있다.
법원도 오래전부터 이 제도 도입을 주장해 왔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11년 9월 취임 직후 도입 필요성을 밝히기도 했고 법안 발의도 이어졌지만 다 무산됐다. 검찰의 반대 때문이었다. 조희대 대법원장 후보자도 최근 이 제도 도입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검찰이 여전히 증거인멸 우려와 피해자의 2차 피해 가능성 등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현실화될지는 미지수다. 장준호 대검 형사정책담당관은 “최근 위치 추적 장치를 부착하고도 도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명확한 구속 기준을 세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검찰과 법원 두 기관이 이렇게 평행선만 달려선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아예 두 제도를 한꺼번에 시행하는 것도 괜찮다는 의견도 나온다. 황정근 변호사도 “영장 항고 심사는 1심 법원이 심사한 기록만 가지고 하는 서류 심사”라며 “두 제도 다 시행해도 사법에 큰 혼란이나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프랑스가 두 제도와 유사한 제도를 함께 시행하고 있다. 법원장 출신 변호사도 “영장 실질 심사 시작할 때만 해도 부담이 크게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많았지만 큰 문제가 없었다”며 “두 제도도 함께 시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