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한마디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우러르는 정당이다. 두 대통령을 향한 숭앙(崇仰)과 추앙(推仰) 분위기는 그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때론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민주당이 변했다. 숭앙과 추앙 대상이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당대표로 이동했다.
김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공통된 특징은 명분(名分)에 대한 집착 또는 집념이다. 명분이 없으면 애써 만들어서라도 자기 결정과 행동을 명분 위에 세우려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는 명분이다. 명분을 쥐면 잠시 죽은 듯해도 다시 살아난다. 명분을 잃으면 다 잃는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이 ‘명분 없는 승리보다 명분 있는 패배가 낫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 김 전 대통령을 거북하게 만든 사건이, 92년 대선 때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대결에서 패배해 정계 은퇴 선언을 했다 96년 이를 뒤집고 정계에 복귀한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훗날 자서전에서도 상당한 지면을 이 부분에 할애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만큼 마음에 걸렸다는 뜻이다.
최근 민주당 내에서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이재명 대표가 위성 정당 금지 공약을 폐기할 뜻을 밝히면서다. 당 내외에서 비난과 비판이 일자 원내대표가 총대를 멨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계 은퇴 약속을 번복했지 않느냐”고 김 전 대통령을 끌어들여 이재명 대표를 변호한 것이다. 과거 같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현 당대표의 방패로 삼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노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차이는 때로 바보처럼 행동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다.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계에 발탁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YS의 3당 합당에 반대하며 혼자 떨어져 나간 것,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부산 출마를 고집한 것도 당시로선 바보 같은 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 갈등, 지역 정서 문제에도 바보처럼 매달렸다. 그걸 이용하지 않고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그런 행동이 쌓여 ‘바보 노무현 신화’를 만들고 훗날 대통령으로 가는 길을 텄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바보처럼 행동한 사례는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선거마다 패배해 궁지에 몰리자 한밤에 김종인씨를 찾아가 당의 위탁(委託) 관리를 맡겼을 때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선거에 승리하자 즉각 권한을 회수(回收)했다. 본인이 바보가 되는 대신 김씨를 바보로 만들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청와대 내에서 지역 문제 해소에 가장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공공연히 ‘부산 갈매기’라는 말을 들먹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첫 대선 도전에 실패하자 완전히 변했다. 두 번째 선거에선 부인을 호남에 상주(常住)시키다시피 했다. 대통령이 되자 여러 요직을 호남에 돌렸다. 노무현의 ‘진정(眞正)’과 문재인의 ‘거래(去來)’가 대비되는 장면이다. 문재인 시대 이후 ‘지역’은 더 심각한 정치 문제로 되돌아왔다. ‘전혀 바보 같지 않은 문재인’이 ‘바보 노무현’의 계승자가 된 것은 역설(逆說)이다.
숭앙과 추앙의 대상이 김대중·노무현에서 문재인·이재명으로 이동한 이후 민주당이 ‘부도덕병(不道德病)’을 앓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말이다. ‘당대표들의 도덕성이 하나같이 평균 이하’라는 탄식이 당내 소리만이 아니다. 이 대표가 ‘밟았던 길’, ’행동하는 방식’, ’토해낸 말’은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졌던 민주당 모습이 아니다.
노무현이라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되자마자 국회의원 배지를 방탄복처럼 껴입었을까. 바보는 그렇게 못 한다. 당을 벼랑으로 몰면서까지 수사와 재판을 따돌리려고 했을까. 김대중 대통령은 모던(modern)한 언사(言辭)와는 달리 상하(上下), 예의, 말의 품격(品格)을 중시하는 약간 구식(舊式) 사람이었다. 그가 토대를 쌓은 정당 대표가 7가지 죄목(罪目), 10가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사태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이재명 대표는 7일 전당대회에서 개딸 당원들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당헌 개정과 공천 과정에서 현역 의원 감점(減點) 폭을 대폭 키우는 공천 규정 개정을 밀어붙였다. 두 가지 모두 자신의 당 장악력을 높이는 수단이다. 개딸 당원을 동원하는 직할 통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재명식(式)의 ‘12월 유신(維新)’이다.
같은 날 국민의힘에서 혁신위원회가 활동을 접었다. 올해 들어 국민의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민의 주목을 받았던 이벤트가 끝났다. 혁신위의 건의안은 ‘지금은 때가 이르다’는 이유로 접수만 됐다. ‘부도덕한 정당’과 ‘무능(無能) 무력(無力)한 정당’은 경쟁 관계일까 아니면 공생(共生) 관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