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16회>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1398)의 묘에 그려진 벽화 가운데 인물도. 앞의 작은 인물은 노비 추정. /공공부문

세계 노예제의 역사를 돌아보면, 노예주도 자신이 소유한 노예가 똑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모르지 않았음을 여러 경로로 확인할 수 있다. 노예주들은 억지 논리와 변명거리를 지어내어 노예들을 인간 이하(subhuman)의 존재로 취급하려 했지만, 인간은 인간을 알아본다. 피부, 머리털, 눈동자의 색깔이 달라도 얼굴을 마주 보고 말 한마디 섞어 보면 누구나 같은 사피엔스임을 느낀다.

조선 사람들도 예외였을 수 없다. 그들이 남긴 문장을 읽어보면, 천민(賤民)도 천민(天民, 하늘의 백성)이란 구절도 보이며, 노비도 동포(同胞)라는 선언도 나온다. 그들도 인간일진대 하늘의 백성을, 동포의 절반을 노비 삼아서 부리면서 죄책감을 못 느꼈을 리 없다.

양민, 천민 모두가 하늘이 낸 백성

1415년(太宗, 15년) 음력 1월 20일, 형조판서 심온(沈溫, 1375-1419) 등이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에게 상소했다. 당시 노비의 소유권을 놓고 형제자매가 쟁송(爭訟)하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 대해 심온은 임금을 향해 다음과 같이 아뢴다.

“하늘이 내신 백성은 본래 양민(良民)도, 천민(賤民)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천민(天民, 하늘의 백성)임에도 [그 일부를] 사유재산으로 삼고선 아버지, 할아버지의 노비라 따지면서 기강도 한계도 없이 쟁송(爭訟)을 벌여서 심지어 골육을 상잔하고 풍속을 훼상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으니 가슴 아픕니다(天之生民, 本無良賤, 將一般天民, 以爲私財, 稱父祖奴婢, 相爲爭訟, 無有紀極, 以至骨肉相殘, 敗傷風俗, 可謂痛心.).”

천민(天民)이란 말 그대로 하늘의 백성, 하늘이 낸 백성이란 뜻이다. 그 전거(典據)는 “하늘이 온 백성을 낳으셨으니 만물엔 법칙이 있네(天生烝民, 有物有則)”라는 <<시경(詩經)>>의 시구이다. 조선 유생들이 졸졸 외던 바로 그 구절에서 “모두가 하늘의 백성이다”란 보편명제가 나왔다.

양천(良賤) 구분 없이 모두가 천민(天民)이라 선언한 후 심온은 임금을 향해 어떻게 하늘의 백성을 노예로 삼을 수 있냐고 항의하고 있다. 이 항변 속에는 모든 인간은 하늘의 아들딸이라는 만민 평등의 대전제가 깔려 있다.

그 대전제는 한민족(韓民族) 고유의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상통하고,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공명한다. “하늘이 온 백성을 낳았으니, 사람이 곧 하늘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하늘을 우러르며 조선 초기의 일부 사대부 대관들은 노비제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비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말대로 천민(賤民)도 천민(天民)이라면 조선의 노비제는 천민(天民)을 천민(賤民) 삼는 역천(逆天)의 제도가 아닌가? 임금이 스스로 천민(賤民) 역시 천민(天民)이라 생각했다면, 어떻게 그 수많은 천민(天民)을 천민(賤民) 상태로 방치할 수 있었을까?

하늘의 백성을 노비 삼을 수 있나?

1444년(世宗, 26년) 윤칠월 24일,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노비를 함부로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며 “하물며 노비가 비록 천민(賤民)이라 해도 모두가 천민(天民)임에랴”(況奴婢雖賤, 莫非天民也.)고 역설했다. 세종은 “하늘이 낸 백성을 부리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형별로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 되겠는가?” 반문한다.

1488년인 성종(成宗, 재위 1470-1495) 19년 6월 18일, 홍문관 부제학 안호(安瑚, 1437-1503) 등은 임금에게 포악한 노비는 엄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성종은 다음과 같이 받아친다. “하늘이 온 백성을 낳으실 때 본래 귀천이 없었다. 비록 노비와 주인이라 하나 애초 모두 천민(天民)이다. 지금 사람마다 자기 노복이라며 잔학하게 대한다면, 이는 하늘의 백성을 해치는 것이니 어찌 임금과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天生蒸民, 本無貴賤。 雖名爲奴主, 初一天民也。 今若人人謂爲己奴僕而逞其殘虐, 則是害天民也, 其謂之有君有法乎?)”

25대에 걸친 472년의 방대한 기록 <<조선왕조실록>>에서 양민과 천민 모두 하늘이 낸 백성이라 정의하는 대목은 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와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불가의 승려도 천민(天民)이라는 구절이 한두 번 등장하지만, 이는 노비가 아니라 불교에 관한 언급이라 일단 논외로 한다.

지난주 15회에서 보았듯 조선의 양반 계층은 노비제를 동국(東國)의 양법(良法)이라 미화하면서 기자(箕子)의 팔조법(八條法)을 근거로 삼았으나 위의 사례들은 “천생증민(天生烝民)”의 유교적 대전제가 조선의 노비제와 충돌함을 조선의 유생들은 물론 국왕까지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록>>에 보이는 다음 사례는 그 점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신분 해방을 꿈꾸던 승노(僧奴) 해심의 좌절

1431년 (세종 13) 3월 17일 조선 조정에서 거론된 사건이다. 당시 조선 땅에 해심(海心)이란 법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 신분상 그는 판목사(判牧事)를 지냈던 김사청(金士淸)의 사내종 신분이었다. 당시 표현으로 그는 승노(僧奴), 곧 머리 깎고 중이 된 노예였다. 불가에 귀의한 해심은 예속의 멍에를 벗고 양인의 신분을 얻기 위해서 소송 중에 있었다.

신윤복의 노상탁발. 기녀에게 길 동냥하는 승려의 모습. /공공부문

해심은 타인을 사주하여 주인 김사청의 범죄를 관아에 고소하는 꾀를 내었다. 김사청을 관아에 고발한 사람은 궁궐에서 일하는 이천부(李天富)란 사내였다. 이천부의 고소에 따르면, 김사청은 자신의 농막을 보수하기 위해 감히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묻힌 건원릉(健元陵)의 나무를 베는 범죄를 저질렀다. 형조·의금부의 관리들은 당장 건원릉에 가서 현장을 조사했는데, 김사청이 베었다는 나무는 능의 교목(喬木)이 아니라 능 주변의 잡목에 불과했다. 또한 김사천을 고소한 이천부는 심문 과정에서 김사천의 사내종 해심이 시켰다고 실토했다.

의금부의 조사 결과를 보고 받은 세종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기각하려 했는데······. 조정 대신들은 거세게 반발하면서 이 사건은 노비가 직접 관에 주인을 고소한 사건은 아니라 해도 신분제의 강상(綱常)에 직결된 사건이므로 반드시 전말을 밝혀서 엄중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통촉했다.

엿새 후인 1431년 (세종 13) 3월 23일, 이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세종은 고심에 빠졌다. 해심은 비록 천민이었으나 당시 양민이 되기 위해서 소송 중에 있었다. 1420년 이후 조선의 국법은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없게 했다. 만약 해심을 천민으로 본다면 노비가 주인을 고소한 사례에 해당하므로 그는 교형을 당해야 한다. 실제로 1422년 형조(刑曹)는 주인을 고소한 노비는 주인의 죄목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교형(絞刑,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며, 세종은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주인을 고소한 종놈을 교수형에 처하소서!”

작은 일로 노비를 교형에 처하기는 꺼렸던 세종의 고심이 깊어졌다. 해심의 현재 신분은 천민이지만, 그는 소양(訴良) 중이었다. 소양이란 양인이 되기 위한 노비의 소송을 의미한다. 해심은 양인이 될 가능성을 가진 천민이었다. 그러한 해심을 일방적으로 주인을 고소한 노비로 간주하여 교형에 처한다면 부당할 수 있다. 세종은 판단을 유보한 채 조정 대신에게 논의하라 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극적으로 엇갈렸다.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이조판서 권진(權軫, 1357-1435) 등 다수파는 이 사건을 종이 주인을 고발한 사건이라 주장했다. 그들은 해심이 비록 양인의 신분을 얻기 위한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소송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천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의금부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해심의 형제와 친족은 모두 김사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노비들이었다. 오직 해심만이 양인이 되기 위해 소송장을 내고 은둔 상태에서 타인을 사주하여 고발장을 냈다. 대신들은 그러한 정황을 볼 때 해심이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고발했다고 봐야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선 이조참판 정연(鄭淵, 1389-1444)과 공조참판 박신생(朴信生, ?~?) 등은 해심이 직접 김사천을 고발하지도 않았으며, 이미 양인이 되려는 해심의 소송이 수리되어 심의 중이니 그 결과를 본 후에 판단해야 합당하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다수파는 해심이 주노의 강상을 어긴 중죄인이라며 임금을 압박했고, 소수파는 신중론을 펼쳤다. 쉽게 말해, 해심의 목숨을 놓고 다수파는 죽이라 하고, 소수파는 웬만하면 살려주자고 하는 상황이었다. 본래 이 사건을 기각하려 했던 임금이었지만, 육조(六曹) 중 호조(戶曹)를 제외한 오조(五曹)의 판서들이 다 들고 일어나 죽이라 외쳐대자 결국 해심의 처형을 결정했는데····.

죽이느냐, 살리느냐? 세종의 번뇌

이틀 후인 3월 25일 의금부는 임금에게 승노 해심을 종으로서 주인을 고소한 죄를 물어 마땅히 교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뢨다. 이에 세종은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 1383-1453)에게 교형에 처하지 말고 곤장 100대를 치는 장형(杖刑)과 3천 리의 유형(流刑)을 내리라 명했다. 세종은 그가 양인의 신분을 얻기 위해 소송 중이라는 점과 직접 주인을 소송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그의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교형을 요구하는 대신들에 비한다면 어질다면 어진 처사라 할 수 있지만, 세종이 제시하는 감형의 논리는 그 당시의 엄격한 신분법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1965년 100원 지폐에 인쇄된 세종대왕의 초상화. 조폐공사. /공공부문

우선 세종은 해심이 승소하여 양민이 되더라도 그전까지는 천민의 신분이므로 소송을 중단하고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조정 다수파의 궤변을 “너무나 교묘한 말”이라며 비판했다. 세종은 그러나 주인과 노비의 관계를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노비가 양인이 되기 위해 소송을 하려는 생각 자체가 주인에 대한 배신이라는 묘한 말을 한다. 다만 해심이 이미 두세 번이나 소송을 제기했으며 결국 정부는 그 소송을 수리했다는 객관적 상황을 인정한 후, 직접 소송을 하지 않고 타인을 통해서 했다는 사건의 특수성을 참작한 후, 해심의 중죄는 인정되나 교형보다는 장형과 유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세종은 1420년 (세종 2) 9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면 수리하지 말고 참형에 처하라”는 예조판서 허조(許稠)의 제안에 동의했다. “천하, 국가, 가족에는 인륜이 있으며 제각기 군신과 상하의 구분이 반드시 있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침범하는 마음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음”이 노비의 주인 고소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 이념적 근거였다. 1431년 세종은 11년 전 스스로 제정한 법의 노끈이 한 승노의 숨통을 조이기 직전 군주의 재량권을 발휘하여 그의 목숨만은 구해주었다. 모든 법은 시대적 한계가 있으며 역사적 맥락이 있다지만, 해심을 살려준 성은이 망극하다 할 수 있을까?

노비가 주인을 고소하면 참형에 처하라는 법을 만든 임금은 세종이었다. 그 법을 비틀어 해심을 딱 안 죽을 만큼 때려서 유배한 임금도 세종이었다. 세종의 두 얼굴은 천민(賤民)도 천민(天民)이라 부르짖으면서 그 절반을 노비로 만든 조선의 모순된 인간관을 보여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