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고(故)이선균 배우의 죽음을 마주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요구' 성명 발표. 봉준호 감독이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다 숨진 배우 이선균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배우 이선균의 죽음은 또 한번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누군가 약점이 잡히면 벼랑 끝까지 내몰아 파국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때마다 ‘공정’이라는 미명(美名)을 앞세우며 ‘관용’은 ‘불공정’과의 비겁한 타협으로 생각한다. 경찰은 죄를 지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혐의’만으로 이선균을 대중의 먹잇감으로 내던졌고, 언론은 검증되지 않은 내용까지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기사로 쏟아냈다. 포털과 유튜브는 이를 무한 반복 재생하며 확산하는 숙주(宿主)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인권을 외치던 야당과 그 많은 시민 단체들도 정작 그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선균의 마약 투약 혐의는 작년 10월 19일 첩보를 수집하는 내사 단계에서 언론에 알려졌다. 경찰 고위 관계자 스스로가 “이 사건은 죽이 될지 밥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불에 안치기도 전에 알려졌다”고 말했듯이, 내사 단계에서 수사 대상자가 노출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의 신분이 노출되자 온라인과 유튜브에서는 관련 기사들이 폭주했다. 네이버에서 ‘이선균’ ‘마약’을 입력하면, 첫 보도가 나온 10월 19일부터 그가 숨지기 전날인 12월 26일까지 무려 1만1000건에 가까운 기사들이 검색된다. 69일간 하루 평균 160건씩 쏟아져 나온 기사들을 읽다 보면 기자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유튜버들도 ‘충격 행각’ ‘경악’ 등 자극적인 제목 아래 온갖 ‘카더라’ 소식을 중계 방송하듯 보도했다.

그는 4차례의 마약 검사에서 3번은 ‘음성,’ 1번은 ‘판독 불가’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간이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면 ‘정밀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고, 정밀 검사에서 음성 판정이 나오면 ‘염색이나 탈색으로 검사 방해 가능성’ ‘신종 약물은 검출이 안 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선균이 다니던 룸살롱 술값만 1000만원’ ‘이선균과 유흥업소 실장의 전화 녹취’ 등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내용과 아내나 가족이 아니면 알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사생활 보도까지 온라인과 유튜브를 통해 확산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3차례나 공개 소환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공개 소환을 훈령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그는 예외였다. 그렇게 아카데미상 작품상에 빛나는 이선균은 ‘디지털 사형 선고’를 받았다. 아무런 직접 증거도 없고 기소조차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미 유죄였다.

이선균의 죽음은 해외에서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투약 혐의가 입증되기도 전에 그가 출연한 영화 개봉이 줄줄이 연기되고 영화 제작이 중단된 데 대해 “한국이 엄격한 나라임을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모범적인 인간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집단적 엄숙주의가 비극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한국의 ‘마약과의 전쟁’이 미국의 70년대, 80년대 정책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처벌 일변도의 정책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 독자는 기사 댓글에서 “한국에서 근무할 때 지하철과 버스에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한 사람들을 수없이 봤다. 중독성이 더 강한 술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것은 위선”이라고 썼다. 영화 전문 매체인 미국 할리우드 리포터는 넷플릭스가 한국에 25억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속한 것을 상기시키며 “미국 배우들 사이에서는 다반사인 마약 스캔들만으로 영화 제작이 중단되는 사례가 반복되면 할리우드가 같이 일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12일 문화 예술인들의 기자회견에서 가수 윤종신은 “악의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소스를 흘리거나 충분한 취재나 확인 절차 없이 이슈화에만 급급한 일부 유튜버와 황색 언론들의 병폐에 대해 언제까지 침묵해야 하는가”라고 했다. 아픈 지적이다. 어설픈 언론 플레이를 한 경찰과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낸 언론도 자성해야 하고, 가짜 뉴스든 뭐든 조회 수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수익 구조를 만든 포털과 유튜브도 개선책을 내놔야 한다. 취재 상대방을 따라다니며 조롱과 욕설을 퍼붓는 일부 유튜버들의 행태는 더는 방치하기 힘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