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연초 김정은은 남쪽을 향해 온갖 거친 말을 쏟아냈다. 전쟁과 피 냄새 범벅이었다. 김정은은 ‘유사시 핵무력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大事變) 준비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했다. 그는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同族) 관계가 아닌 전쟁 중인 두 교전국(交戰國) 관계’라고 규정했다.
3대 세습 절대 권력자 김정은 말은 중요 정보다. 그러나 그의 말 전체가 통째로 진짜 사실은 아니다. 전쟁 도발 전과자(前科者)를 상대할 때는 그들의 ‘입’과 ‘손’을 동시에 쳐다봐야 한다. 하나만 보면 오판(誤判)한다.
전쟁 범죄자들은 항상 한 말에 두 가지 상반(相反)된 뜻을 담았다. 히틀러는 전쟁을 위협하면서 그 안에 평화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떼놓지 않았다. 상대국 국민을 자기 말(협박과 회유)에 호응할 세력과 반발할 세력으로 나눠 그들이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저마다 편리하게 해석할 함정을 팠다. 상대방의 내부 분열을 유도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에게 무릎 꿇은 나라는 모두 이 미끼를 물었고 안에서 분열했다. 지금 김정은도 누가 미끼를 무는지 지켜볼 것이다.
‘정보’에는 ‘사실’과 사실에 토대를 둔 ‘해석’이 같이 들어 있다. 정보를 접할 경우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해석’인가를 분간해야 한다. 북한은 러시아에 탄약과 무기를 대규모로 수출하고 있다. 전쟁을 준비하는 나라가 할 짓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핵폭탄과 미사일 숫자를 늘리는 데 국력을 쏟아붓고 있다. 화살표 중 하나는 ‘전쟁 의사 없음’을, 또 하나는 ‘전쟁 준비 압박 강화’라는 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 혼란된 신호가 한국 안에서 혼란을 불러온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옆집에서 돌멩이 던진다고 더 큰 돌을 던져서야 무슨 도움이 되냐’고 했다. 김정은의 핵폭탄은 ‘돌멩이’가 아니다. 김정은은 ‘이러다가 전쟁 나겠다’는 이 대표 발언을 ‘압박하니 내부 분열이 생기는구나’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총선 승패에 따라 이런 생각은 더 굳어진다.
‘사실’과 ‘해석’의 중간지대에 ‘상대 의도(意圖) 추측’이 있다. 사실 수집이 충분하지 않으면 ‘의도 추측’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김정은 체제는 ‘최악(最惡) 독재’ ‘최악 가난’ ‘최악 부패(뇌물)’가 결합된 ‘3악 체제’다. 더 악화됐을 수는 있지만 갑자기 출현한 현상은 아니다. 정부가 핵공갈을 ‘체제 결속용’이라던가 ‘흡수통일 공포 때문’으로 예단(豫斷)해서는 안 된다. ‘과잉 대응’과 ‘과소평가’는 다 위험하다.
김정은의 ‘동족(同族) 부인’ 발언을 남·북이 동·서독식 독립국가 관계로 변화하는 계기로 삼자는 일각의 해석 역시 너무 가볍다. 그럼 탈북(脫北) 동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김정은은 ‘평화 통일’ 구호 속 ‘평화’는 포기해도 뒤에 감춘 ‘적화(赤化)’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 핵 위기는 1회적 현상이 아니다. 반복되고 더 악화될 것이다. 핵 위기 근본 원인이 핵무기의 ‘있고 없음’과 미사일 남·북 격차이기 때문이다. 북한 핵폭탄을 80~100개 안팎으로 추정한다. 과거의 미사일 고정(固定) 발사 기지에서 이동식 발사대로, 미사일 추진체도 액체 연료에서 즉각 발사 가능한 고체 연료로 전환하고 있다. 극(極)초음속 미사일도 시험한다. 한국의 대응 수단인 3축(軸) 체계로 ‘3~5분 안’에 사전(事前) 탐지해 요격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최종 수단이 ‘대량 응징 보복 수단’으로 북이 공격을 단념토록 하는 것이다. 핵심 무기가 폭탄 8톤을 적재할 수 있는 ‘현무-5′ 미사일이다. 북한이 보유한 히로시마급 핵폭탄 폭발력은 ‘현무-5′의 1500배다. 김정은은 이 격차를 이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재래식 무기로는 핵무기를 억제할 수 없다. 이 사실을 외면하면 국제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김정은에게 끌려다닌다. 한국군은 2028년까지 41조 예산을 3축 보완에 투입한다. 그래도 격차는 메워지지 않는다. 미국 항공모함과 대형 폭격기의 한국 전개는 국민 마음을 안심시키긴 해도 북의 핵과 미사일 개발 속도를 늦추진 못한다. 대안(代案)이 핵 개발 또는 전술핵 배치인데 미국은 비협조하고 중국은 보복할 것이다.
국민이 눈떠야 눈먼 정치인이 깨나고, 둘이 합쳐져야 대통령이 결단할 수 있고, 국민·정치인·대통령이 하나 돼 밀고 나갈 때 미국도 ‘한국 비상(非常) 상황’을 외면하지 못한다. 생존을 위해 만난(萬難)을 무릅쓸 각오가 서야 적(敵)도 움찔하고 동맹국도 움직인다. 그래야 주권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