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용장(勇將)형 리더다. 잔 계산이나 좌고우면 하지 않고 정면 승부하는 용맹함이 돋보이는 스타일이다. 그가 일약 국민적 스타가 되고 검찰총장을 거쳐 단숨에 정권까지 거머쥔 데는 그의 승부사 기질 덕이 컸다. 위기가 닥쳐와도 타협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직선으로 돌파해 판세를 뒤집곤 했다.
그는 싸우되 큰 싸움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맞서 싸운 상대는 당대의 대통령, 권력 실세처럼 하나같이 ‘센 놈’들이었다. 그는 박근혜 정권 심기를 거슬러가며 ‘국정원 댓글 사건’을 수사해 3년간 지방 한직을 전전했다. 앞날을 가늠하기 힘든 처지였지만 검찰 고위층이 늘어선 국감장에 나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국민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슬 퍼런 정권 앞에서도 한 치 비겁함이 없었다.
그는 문재인 정권과도 정면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최고 실세였던 조국 법무장관을 수사해 강남 좌파의 위선적 민낯을 세상에 알렸다. 청와대가 총동원된 울산 선거 개입, 대통령의 한마디로 강행된 탈원전 경제성 조작도 눈감지 않았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의 무모한 싸움처럼 보였지만 그는 온갖 탄압을 버텨내며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가 문 정권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은 이기는 길을 갔기 때문이었다. 공정과 상식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무기로 싸웠기 때문에 그에겐 힘이 있었다. 정권 아닌 법치, 진영 아닌 정의의 편에 선 덕분에 국민을 우군으로 삼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정권교체 세력의 구심점이 되어 건곤일척의 대선 무대에 올라갔다. 정치 초보답게 실수도 잦고 작은 전투에선 무수히 졌지만 타고난 승부사 기질은 큰 선거 판에서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그가 이준석을 끌어안고 안철수와 손잡으며 반문(反文) 대연합을 펼친 장면은 지난 대선의 최고 하이라이트였다. 그리고 정권 교체를 이루어 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큰 승부를 주저하지 않았다. 취임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복원했으며, 빗발치는 비판을 뚫고 한일 관계 정상화를 이끌어냈다. 친중·친북 쪽으로 일탈했던 국가 진로를 정상 궤도로 되돌린 거대한 외교 승부수였다. 그 와중에 불거진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는 친일 프레임에 말려들 수 있는 폭탄 같은 이슈였지만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온갖 괴담을 퍼트리던 민주당이 지금은 오염수의 ‘오’자도 꺼내지 않으니 그가 옳았음이 증명된 셈이었다.
그는 역대 정권이 겁내며 피해온 노동 기득권과의 일대 혈전도 벌였다. 대한민국 최강의 투쟁 집단으로 군림하는 민노총의 불법·폭력에 무관용 원칙 대응으로 맞섰고, 귀족 노조가 수십 년간 감춰오던 회계 장부도 공개시켰다. ‘건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건설 범죄꾼 수천 명을 잡아들이면서 돈 뜯고 행패 부리는 공사 현장 관행을 퇴출시켰다. 윤 정권의 공과를 따지긴 아직 이르지만 이런 성과들은 분명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승부의 스케일이 작아졌다. 가치보다 정파적 이익, 대의보다 정치 공학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국민이 이것을 실감한 계기가 지난 3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였을 것이다. 자기 사람을 당 대표에 앉히려 나경원을 끌어내리고 안철수에게 “방해꾼이자 적”이란 이례적 메시지를 날렸다. 대통령이 여당 인사에 관여할 순 있지만 그 방식이 너무도 거칠었다. 공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았다. 대통령이 내부의 적과 싸우는 모습은 거악(巨惡)에 맞서 큰 싸움을 벌이던 승부사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검사 일색의 편중 인사, 국민과의 소통 부재 등이 쌓여기면서 윤 대통령에겐 기득권의 색채가 더해져 갔다.
김건희 여사 논란에서 그는 더욱 작아 보인다. 그토록 서릿발 같던 윤 대통령이 이 문제 앞에선 원칙을 잃고 표류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김 여사가 함정 공작의 피해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많은 국민이 김 여사의 부적절한 처신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왜 뇌물에 가까운 고가 명품을 받았는지에 대해 대통령실은 설명하지 못한다. 명품 백을 국고에 귀속시켰고, “돌려주면 오히려 국고 횡령”이라는 해명 같지 않은 해명만 늘어놓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런 요령부득 논리 뒤에 숨어 김 여사 지키기에 몰두하는 듯 보인다.
윤 대통령은 올해 신년 회견도 생략했다. 대신 공영방송 대담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만약 김 여사 관련 질문이 부담스러워 각본 없는 회견장에 서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피하는 법 없던 ‘윤석열다움’과 거리가 멀다. 김 여사 문제 때문에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사퇴시키려 한 것이 사실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과거의 윤석열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상황은 아연하기만 하다. 보편적 가치의 편에 서서 위기를 직진 돌파하던 큰 승부사 윤석열은 어디 갔나. 우리가 알던 ‘그 윤석열’은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