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을 했고 정권 핵심 요직에도 있었던 유명 386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 ‘나는 민주화 운동에 청춘을 희생했다. 안 그런 자들은 내게 죄책감을 가져라’ 하는 식으로 말했다. 386 운동권의 투쟁이 사회주의 혁명이나 ‘주사파 정신병’ 운동이지 ‘자유민주주의’ 운동은 아니었다는 진실을 되풀이하는 노릇도 이젠 지쳤다.

대신 좀 다른 얘길 해 보련다. 내가 만나본 386의 위 세대들은 386 운동권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386 운동권의 과격함이나 모순성도 그 나름대로 시대적 의미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는 이해심도 거기서 나왔다. 1987년 이후 운동권만을 따로 뽑았던 대기업이 있었고, 운동권 출신 법조인이 대거 양산될 수 있었던 건 이 사회의 선배들이 그들에게 벽을 치지 않았다는 증명이다. 모든 분야에서 그랬고, 정치권에서의 출세는 물론이다. 금전적 보상에 각종 혜택까지 제도화됐다.

이런 ‘너그럽게 모호한’ 기준으로 이렇듯 극진한 대접을 받은 집단은 대한민국 역사상 있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데 정작 그들은 이 사회의 선배와 후배들에게 악질적이다. 소설가는 기자나 탐정만큼 취재한다. 앵벌이 포주와 마주했다. 내가 물었다. “앵벌이들이 왜 못 도망가는 건가? 쇠사슬에 묶인 것도 아닌데.” 약간의 침묵을 깨고 포주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 잊을 수 없는 표정을 나는 저 386 운동권 정치인의 얼굴에서 재회한다.

87년 넥타이 부대가 지금 70대 이상이다. 산업을 발전시킨 그들은 노력한 결과 말고는 바라지 않았다. 그들 같은 이들이 노소(老少)와 세대를 불문하고 자유민주주의자들이다. 자유민주화 대중, 자유민주화 세대는 있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자유민주화 학생운동권은 존재한 바가 없다. 386 운동권은 전두환의 적이었을 뿐이다. 또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에 무슨 민주화 운동이 있단 말인가. ‘당신들’이 사회주의자였다고 주사파였다고 ‘미워하는’게 아니다. 무식하고 특권적이고 타락해서, 위선 속에서 부패 생태계, 반지성적 생태계를 만들어 사기 치며 영업하고 약탈해서 ‘싫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미워서가 아니라 싫어서 헤어진다.

386이라는 문화적 분위기에 최면당해 착취당하던 대중이 앵벌이의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유치하고 위험하고 부당해서 더는 당신들과는 못 지내겠다는 거다. 군부 독재가 종식되듯 운동권 정치 청산에 나선 것이다. 억울하다니, 적반하장도 지옥감이다. 시대에 뒤떨어져 소멸하는 일이 왜 당신들에게만 예외인가? 소방관들이 또 순직했다. 27세, 35세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희생이란 그런 것이다. 저기 저런 말은 부모가 자식한테도 못 하는 말이다. 인간으로서의 태도를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