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0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한 유명 교수(역사학자)가 2년 전 어느 대중 강연에서 1952년 최초의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에 문맹률이 높은데 누가 기호 1번 차지하느냐가 되게 중요하거든요. 이승만 대통령이 기호 1번이에요. 당연히 (당선)되는 겁니다. 이건 뭐,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강한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 거고요······.”
이 역사학자는 이날 강의에서 김구도 김규식도 없는 1952년 상황에서 국민이 아는 정치인이라곤 이승만이 유일했으며, 전쟁 중이라 다수 국민은 정치엔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유권자 대부분은 문맹이어서 누구든 기호 1번을 달고 나오면 당선되는 게 당연했다는 주장을 마구 펼쳐댔다. 이승만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유는 이승만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승인도 아니라 국민적 무관심과 무지의 결과였다는 기괴한 해석이다. “독재자 이승만”이 비민주적 속임수로 우매한 대중을 기만하여 독재 권력을 연장했다는 86세대 좌편향 학자들의 전형적인 논법인데, 과연 학술적 타당성이 있을까?
서울대학교 유명 역사학자의 발언이라 무조건 믿고 본다면 큰 오산이다. 세상에는 정치 편향에 휘둘려 현실을 왜곡하고 문서를 곡해하는 역사학자들이 수두룩하다. 역사 서술에서 악마는 잠복한 바이러스처럼 언제나 디테일 속에 똬리 틀고 있다. 그 악마를 찾아내기가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인터넷 검색창에 “제2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라는 검색어만 넣고 클릭하면 관련 사실이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나온다.
1952년 8월 5일 전쟁 와중에 치러진 제2대 대한민국 정·부통령 선거에서 기호 1번을 달고 출마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이 아니라 조봉암(曺奉岩, 1898-1959)이었다. 이승만은 기호 2번이었다. 또한 전쟁 상황이었음에도 전국 투표율은 88.09%에 달했다. 사상 처음 치러지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국민 다수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증명하는 놀라운 수치다. 그 결과 74.61%라는 실로 무서운 득표율을 과시하며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 관련 자료를 조금만 들춰보면 누구나 위의 객관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번을 달고 출마한 조봉암의 선거 포스터도 수없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대중 앞에서 왼손 검지로 1자까지 만들어 보이면서 이승만이 기호 1번을 달고 나와 문맹의 유권자들은 무조건 1번을 찍었다고 단언하고 있는 저 역사학자는 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가? 무엇을 바라고,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 가당찮은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가? 직접 확인도 하지 않고 지레짐작을 객관적 사실처럼 꾸며서 말했다면 용서받기 힘든 학문적 부정직(academic dishonesty)이다. 이승만을 폄훼하기 위해 고의로 그런 거짓을 말했다면 이념적 인격 살해이며 정치적 역사 날조이다.
역사학자의 거짓말을 폭로한 영화감독
이 역사학자의 터무니없는 오류를 내게 알려준 인물은 최근 전국에서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 전쟁”을 만든 김덕영 감독이다. 2023년 4월 중순 김덕영 감독은 캐나다에 있는 나와의 첫 전화 통화에서 “건국 전쟁”의 기획 의도를 소상히 알린 후 말했다. 저 역사학자의 말이 진짜인지 검증하기 위해 “1950년대 선거 포스터를 샅샅이 찾아봤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단 한 번도 기호 1번을 달고 대선에 출마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김덕영 감독이 조사한 바와 같이 1952년 기호 2번으로 출마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 이후 대선에서도 기호 1번으로 출마한 적이 없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기호 2번이었고, 1960년 선거에서는 기호 3번을 달고 있었다. 반복하지만, 1952년 선거는 물론, 그 이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은 단 한 번도 기호 1번을 달고 출마한 적이 없다.
김덕영 감독은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쳐서 봉급 받아 먹고사는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는 과거의 문서와 영상을 발굴해서 대중의 눈앞에 생생하게 과거의 실상을 재현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전문 역사학자의 과거사 왜곡을 밝혀내고 엉터리 해석을 물리치는 힘은 모순과 부조리를 거부하는 시민의 상식과 거짓을 물리치려는 인간의 정직함에서 나온다.
누구든 진실 규명의 의지를 품고 집요하게 역사적 기초 사료를 발굴하고 탐구하면 역사학자의 왜곡과 궤변을 오로지 팩트(fact)에 근거해서 허물어 버릴 수 있다. 역사학은 절대로 역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민사회가 눈을 부릅뜨고 정치화된 역사학계의 상습적 역사 왜곡을 낱낱이 밝혀나갈 때,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는 국민의 시각이 바로잡힐 수 있다. 대중 강연에서 이승만이 기호 1번을 달고 나와서 문맹의 유권자들에게 몰표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해대는 역사학자가 자라나는 청소년의 머릿속에 그릇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이 현실을 이제는 근본적으로 고치고 바꿀 때가 됐다.
김영삼 정권 때의 “역사 바로 세우기” 대신 지금은 “현실 바로 세우기”를 위해서 역사를 제대로 탐구해야 할 때다. 1980년대 이래로 디테일에 악마를 숨긴 섬뜩한 거짓의 역사관이 대한민국이란 열린 사회의 공론장을 점령하고 오염시켜 왔기 때문이다. 한편 “건국 전쟁”은 10일 기준 누적 관객 수 18만 명을 넘기는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김덕영 감독의 작가정신과 예술혼이 거짓 뉴스와 허위 정보를 마구 엮어서 일방적으로 이승만 악인전(惡人傳)을 집필해 온 역사학계의 고루한 시대착오와 부족주의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그 어떤 역사가의 전문지식도 정직한 시민의 상식을 이길 수 없다. 하물며 기호 2번을 1번이라 조작하고, 88.09% 투표율을 보인 유권자를 무관심한 군중이라 둘러대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74.61%의 유권자를 닥치고 1번만 찍는 문맹의 무지렁이로 몰아가는 황당무계한 역사 왜곡의 주체임에랴.
“슬픈 중국”에서 왜 한국 현대사를 논하나?
독자로서 “슬픈 중국”이란 제명 아래 왜 전근대 한국사를 논하고, 왜 또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그 이유는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중국 문명의 영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에선 왕조 멸망의 전야까지 다수 유생(儒生)이 오매불망 명나라를 그리면서 위정척사의 고립에 빠져 있었다.
중국을 대국으로 숭상하는 오랜 전통의 관성은 실로 강력하여 일제에 강점당해 식민 지배를 겪고 난 후에도 한반도 지식인들은 중국을 향한 존경과 흠모를 극복하지 못했다. 중국 마오쩌둥의 대규모 파병으로 파멸을 면한 북한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자력갱생”을 그대로 베껴서 “주체사상”을 만들고는 마오쩌둥식 대중 동원과 대민 지배를 그대로 흉내 내었던 마오쩌둥의 ‘꼬맹이 동생’(little brother)이었다. 김일성의 남침으로 3년의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대한민국의 지식인들도 중국을 숭모한 점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1970~80년대 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들이 사상의 스승으로 떠받든 저널리스트 리영희의 중국 관련 서적들은 소위 “진보세력”의 의식을 지배하는 운동권의 바이블이 되었다. 문제는 리영희의 저서들이 마오쩌둥을 미화하고 칭송하는 중국공산당 선전물을 방불케 한다는 점에 있다.
1960~70년대 한국 대다수 언론은 외신을 통해서 중국 문화혁명에 관한 꽤 상세하고 객관적이며 정확한 보도를 일상적으로 전하고 있었다. 한국의 대중은 날마다 신문만 봐도 문화혁명의 참혹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리영희의 저서는 그러한 한국 사회에 중국공산당의 선전물을 버젓이 옮겨와선 “문혁의 실상”이라며 마오쩌둥의 인격 숭배까지 정당화하는 지적 착오를 범했다. 리영희의 영향을 받은 대한민국의 “진보세력”은 희대의 독재자 마오쩌둥을 존경하는 시대착오와 최악의 전체주의 파시스트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으로 섬기는 정신착란을 연출했다. 그렇다면 리영희는 왜 마오쩌둥을 극찬했는가? 그 이념의 뿌리가 구한말 위정척사파에서 이어지는 친중 사대주의의 황무지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을 숭상하고 북한을 옹호하는 이들은 예외 없이 이승만에 대한 혐오감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승만은 중국 문명에서 벗어나 중화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타파하고 구미(歐美) 모델의 근대화를 지향했다. 이승만은 해방공간의 극한적 좌우익 대립 속에서도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신생국을 건립하여 미국 주도의 자유적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에 편입시킨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을 흠모하고 김일성을 존숭했던 세력은 반미와 반자유로 무장한 시대착오적 이념의 일탈자들이었다. 선명한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제네바 협정과 인권의 가치를 내세워 2만 6천 명 반공포로를 석방한 이승만은 시대착오적 이념의 일탈자들에게 불구대천의 “원쑤”가 되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이승만이 세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무너뜨리는 이념 공세를 가해 왔다.
리영희의 악의적 오역, 반대한민국 세력의 정치전 무기로
그런 악의적 이념 공세 중에서도 특히 리영희가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관련해서 유엔 총회의 결정문을 왜곡한 사례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역사학의 타산지석이 되어야 마땅하다. 194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Ⅲ) 2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어 번역: “2.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감시하고 협의할 수 있었으며 한국인의 대다수가 살고 있는 한반도 내의 지역에서 유효한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 또 이 정부는 임시위원회의 감시 아래서 한반도 그 지역의 유권자들의 자유로운 의사가 적법하게 표현된 선거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한반도 유일의 그러한 (합법) 정부라는 점을 선언한다.”
영어 원문: “2. Declares that there has been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 that this Government is based on elections which were a valid expression of the free will of the electorate of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
리영희는 대한민국이 유권자의 자유로운 의사가 표현된 공정한 선거에 의해서 성립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유엔 총회의 결의문을 “대한민국은 38선 이남에 수립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악의적으로 오역했다. 그의 오역은 대한민국의 국제법적 합법성과 헌법적 정당성을 부정하는 학계, 언론계, 정계, 문화계의 반대한민국 세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악용되었다. 리영희는 왜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를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오역했을까? 몰라서 틀렸나? 알면서 왜곡했나?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중앙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5월 10일 총선거는 전국 만 21세 이상 남녀 총유권자 813만여 명 중에서 785만 명(96.4%)이 선거인 등록을 했고, 그중 95.5%가 투표를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는 그렇게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나라 세우기’의 열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명실공히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였다. 그날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은 5월 31일 제헌의회를 개원했으며, 7월 17일에는 드디어 대한민국 헌법이 공표됐다. 그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대 대통령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요컨대 한국 헌정사 최초의 ‘민주 정권’은 1948년 수립된 바로 그 정부였다.” (송재윤, “’1948년 정부’가 대한민국 첫 민주정부다,” 朝鮮 칼럼, 2022년 3월 8일).
마오쩌둥을 흠모하고 경애하여 숱한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를 엮어서 그의 공적을 미화하고 그의 인격을 찬양했던 리영희는 1948년 유엔의 감시하에서 국민 총선거를 거쳐 국민 절대다수의 승인을 얻어서 수립된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정통성을 흔쾌히 인정할 수 없었다.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를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왜곡한 그의 의도는 진정 무엇이었을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대한민국만큼 합법적이라 주장하고 싶었음일까? 리영희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 뿌리 깊은 그의 친중주의가 반미주의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친중·반미는 곧 반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슬픈 중국”에서 한국의 서글픈 친중 사대주의를 다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