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를 보고 방관하지 않는 100만 학도와 국민들이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자신을 하야시킨 시위대를 두고 이렇게 말한 ‘민주주의자’ 이승만은 그간 돌팔매로 만든 무덤에 묻혀 있었다. ‘건국전쟁’은 좌파의 ‘이승만 악마화’를 바로잡는 영화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수천만 국민이 50년 넘게 ‘가스라이팅’ 당할까. 그게 좌파 힘만으로 가능한가.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가 과거 월간조선에 말했다. “정부가 (국장 대신) 국민장으로 축소해 4·19 학생들 반발을 무마하려 했어요. 건국 대통령으로 대접받지 못하면서 욕먹을 이유가 없다 싶어 가족장을 고집했습니다.” 1965년 7월 27일 이승만 장례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대신 정일권 총리가 참석해 노산 이은상이 대신 쓴 대통령 조사를 읽었다.
반대로 김종필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박 의장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 적당한 때에 서울로 모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62년 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은 알 수 없으되, 그 시절 교과서는 물론 대중문화도 모두 이승만을 폄훼했다. 1967년 라디오 정치 드라마 ‘잘돼갑니다’ 이후 ‘광복 20년’ ‘격동 30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 MBC ‘제1공화국’ 등에서 그려진 이승만은 ‘미국에서 돌아와 세상 물정 몰랐던 늙은 대통령’이다. ‘잘돼갑니다’ 원작자 한운사는 “6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시킨 이승만을 골탕 먹이기 위해 쓰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존경하게 됐다”고 했지만, 존경은 속으로만 한 것 같다. 그간 보수 대통령들도 이승만을 외면해야 하는 처지였고, 방송사는 ‘반론권’이 없는 이승만을 짓이겨 댔다.
그런 박정희도 이승만과 함께 수모를 겪었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하고 배우 권해효가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멘터리 ‘백년전쟁(감독 김지영)’. 이승만을 ‘하와이 깡패’, 박정희를 ‘스네이크 박’이라며 조롱하고, 왜곡했다.
2013년 방통위는 이 다큐를 방송한 ‘시민방송 RTV’에 법정 제재 조치를 내렸다. RTV가 불복했지만 1, 2심 재판에서 방통위가 이겼다. 2019년 대법원이 뒤집었다. “이승만·박정희 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이미 주류적 지위를 점하고 있으므로, 이 사건 각 방송에서 이에 관한 내용을 소개해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에 대해서는 방송 사업자보다 완화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시민단체의 사실 왜곡은 괜찮다? 법복을 입고 궤변을 짜낸 대법관은 김재형·박정화·민유숙·김선수·노정희·김상환, 여기 대법원장 김명수가 한 표를 더해 7대6으로 가짜 뉴스가 이겼다.
조선일보와 이영훈 같은 학자들이 ‘이승만 재평가’를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그를 돌무덤에서 꺼내지 못했다. 보수 정치인이나 엘리트 중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공언한 이는 드물다. 겁 많고 게으른데 손해는 보기 싫어, 못 본 척 던져버린다. 보수는 흠결의 ‘흠’자만 나와도 바로 손절한다. ‘반일종족주의’ 저자 이영훈 교수 연구실에 찾아가 “친일파 XX”라며 주먹을 휘두른 세력이 지난해에는 친북 목사 팔뚝에 몰카를 심어 대통령 부인을 도촬했다. 전향한 운동권으로 우리 경제사를 가장 실증적으로 공부한 우파학자 이영훈이 ‘서울의 소리’에 당할 때, 보수는 슬그머니 그를 손절했다.
‘건국전쟁’의 흥행에서 좌파 프레임에 굴복했던 우파의 각성을 본다. ‘보수 이론’을 공부해보겠다는 사람도 여럿이다. 독일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문장을 패러디해 본다. 이런 두려움일 것이다. “그들이 이승만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좌파가 박정희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