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1회>
강대국 틈에 끼인 약소국의 생존전략
세계열강의 전쟁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는 약소국의 비결은 무엇인가? 1959년 시카고 대학 출판사에서 펴낸 폭스(Annette Baker Fox, 1912-2011) 교수의 <<약소국의 힘: 2차대전 중의 외교(The Power of Small States: Diplomacy in World War II)>>은 슬기로운 외교 전략으로 국체를 보전한 터키,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페인 등의 사례를 분석했다. 이 모든 나라들은 2차 대전의 화마 속에서도 강대국에 병합되지 않고서 오히려 더 강성한 국가로 거듭났다.
세계 외교사에는 군사적 열세에 처한 약소국이 강대국을 압박하여 큰 양보를 받아내는 외교술을 발휘한 사례가 적지 않다. 약소국 지도자가 다양한 전술과 기상천외한 술수를 써서 강대국 실권자들을 절절매게 가지고 노는 흥미로운 장면도 종종 보인다. 북한의 기습 침략으로 절멸의 위기까지 내몰렸던 대한민국의 국체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이승만의 외교 노선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에 비하면 1990년대 이후 북한의 벼랑끝전술은 전체 인민을 볼모로 잡은 전체주의 세습왕조의 권력 유지책으로 인류 외교사의 하지하책(下之下策)일 뿐이다.
한국전쟁 중 이승만 정권과 미국 정부의 대립은 1951년 정전 협상이 개시될 때부터 1953년 7월 말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갈수록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정계를 뒤흔드는 더 강경한 외교 전술을 구사했다. 마침내 1953년 6월 반공포로 전격 석방이라는 이승만의 기습 작전에 한 방 얻어맞은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억류하여 권력을 교체하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에 질세라 이승만은 더 당당하게 미국을 압박했고, 그 결과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수세에 몰려 대규모 경제원조, 지속적 군사 지원, 상호방위조약을 약속하는 외교사의 역설이 일어났다. 미국을 쥐고 흔든 이승만의 외교력에 대해 미국의 한 연구자는 장기판 “졸(卒, pawn)”이 “차(車, rook)”처럼 활약한 사례라고 평가했다(Barton J. Bernstein, “Syngman Rhee: The Pawn as Rook,”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10:1, 38-48).
“반공포로석방,” 무엇을 위한 포석이었나?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 장군은 17일에 걸친 마라톤 군사 회담 끝에 중국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와 북한 김일성(1912-1994)을 상대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한국 측 대표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항간엔 지금도 유엔군에 작전 지휘권을 넘긴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휴전의 당사자도 될 수 없었다는 낭설이 떠돈다. 뜬소문에 현혹당한 한 유명 철학자는 2019년 공영방송에 나와선 이승만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매도하는 역사적 몰상식을 드러냈다. 대체로 이러한 발상은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이거나 조선노동당과 북한에 동조하는 남한 좌익 세력의 흑색선전일 뿐이다.
이승만은 휴전 협상을 거부했다. 당시 이승만의 입장은 줄기차게 “통일 없인 휴전 없다,” “중공군 철수 이전엔 휴전 없다”였다. 이승만은 휴전회담 한국 측 대표를 소환하고 “단독 북진”의 주장을 이어갔다. 완강하게 정전에 반대하며 중국군의 전면 철수와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던 이승만은 당연히 자의에 따라 휴전회담에 불참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5월 25일 유엔사령부의 결정문은 이승만이 강력히 요구했던 “휴전 직후에 곧 반공포로를 석방한다”는 약속을 빠뜨렸으며, 대신 인도군이 중국군과 함께 포로들을 관리하고 문책한다는 조항을 포함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한국 측은 협상 테이블에 못 낀 게 아니라 협상을 거부하고 안 나갔다.
휴전협정 39일 전인 6월 18일 이승만은 전국 9개 전쟁포로 수용소에 억류돼 있던 2만5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벼랑 끝 조치를 감행했다. 그 소식이 전 세계로 타전되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격노했고, 처칠 수상은 면도 중 놀라서 얼굴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서방세계의 반응을 익히 예측했던 이승만은 눈도 깜작이지 않은 듯하다. 그 후 며칠에 걸쳐 그는 2천여 명의 반공포로를 더 석방하는 초강수를 이어갔다. 6월 19일 새벽 도쿄 주재 미국 언론사 특파원들이 전한 포로 탈출 현장의 긴박한 상황은 읽는 이의 머리털이 주뼛 서게 한다.
“저항하는 남한이 어제 임박한 협정(truce)에 닥칠 위협 따윈 생각지도 않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2만5000명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오늘 이른 새벽 서울 부근 항구도시 인천의 수용소에서 1500명 반공포로 대규모 탈출을 시도했고, 미국 병사들 및 해병대 병력과 충돌했다. 최초의 비공식 보고에 따르면, 포로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0명 사망, 93명 중경상). 이 수용소는 포로 탈출이 일어난 다섯째 캠프였다.” (The Evening Star, 1953. 6. 18. 도쿄와 워싱턴 사이 시차로 미국 동부 시간으로 18일에 보도됨.)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대규모 반공포로들을 향해 미군 병력이 급기야 발포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그는 “유엔사령부와는 충분히 협의하지 않고서”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 대변인은 우리가 그들(중국과 북한)의 계획을 수포로 돌렸다”고 공식적으로 발언했으며, 라디오 방송으로 대한민국 국민을 향해서 “석방된 반공포로들을 도와주라” 촉구했다.
당시 중국과 북한은 반공포로 문제를 협정의 중대 이슈로 삼고 있었다. 휴전협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단독으로 감행한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의 협상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유엔에 대항한 공개적 저항(open revolt against U.N.)”이나 “진짜 사보타주(real sabotage)”라 보기에 충분했다.
이승만은 대체 어떤 힘을 믿었나?
그해 6월 초 미국은 백선엽 등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실세를 미국으로 초빙하여 이승만을 압박하는 방법도 모색했었다. 미국의 의도가 먹힐 새도 없이 그들은 오히려 이승만의 입장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만 역설했다. 6월 5일 이승만은 공산 세력의 요구를 수용하는 미국에 항의하면서 단독자결권 행사를 천명하고는 이틀 후 방미 중인 장성들에게는 즉각 소환을, 도미 예정이었던 장성들에게는 출발 중지를 명령했다. 11일 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로 이승만은 정전협정으로 지리멸렬한 교전 상황을 서둘러 끝내려 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위기에 빠뜨렸다. 미국 정부는 이후 한 달 이상 지체된 휴전협정을 다시 이어가야 했다.
반공포로 석방의 초강수를 두고 나서 미국 정계는 일면 이승만에 등을 돌리는 분위기를 보였다. 6월 19일 워싱턴포스트지 사설(社說)은 “이승만, 세계를 괴롭히다(Rhee spites the world)”라는 제명 아래 이승만의 도발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한국의 정전협정을 고의로 망치려는 이승만의 담대한 시도는 상상을 넘어선다. 이 완고한 늙은이는 수백만의 희망을 짓뭉갠 막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전체 구조를 깨부수겠다는 그의 태도는 ‘내가 간 다음에 홍수(après moi le deluge)’라는 선언이다. 2만5000명을 성공적으로 석방한 이승만 박사의 음모보다 더 놀라운 점은 유엔사령부, 특히 미국이 이승만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는 점이다(The Washington Post, 1953. 6.19.).”
이 사설은 미국 정부가 이승만의 도발을 사실상 묵인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의 정부 임원들이 사전의 이승만의 계획을 몰랐었기를 희망하지만, 정황상 미국의 공모한 혐의를 배제할 수 없다며 국정 조사를 요구했다. 사설은 근본 문제가 미국 정책에 있다며, 장개석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은 “더 완강하게 저항할수록 더 큰 존중을 받는” 역설을 배웠다며 미국의 유순한 아시아 정책을 비난했다. 신경질적인 어조로 “더 좋은 자가 없어서 작은 독재자(petty tyrant)를 지원한 미국의 죄과”라고 이승만에 휘둘리는 미국 정부를 비판했다. 이승만 때문에 휴전협정이 결렬되어 또 다시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미국 젊은이들이 죽어갈 판이니 미국 언론인들이 분노할 만도 했다.
신기하게도 이승만은 향후 1년에 걸쳐서 그토록 강경하게 돌아선 미국 언론의 논조를 슬그머니 자기편으로 되돌리는 외교적 마력을 발휘한다. 그 이듬해 7월 28일 이승만은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특전을, 8월 2일에는 뉴욕 맨해튼 마천루가 즐비한 “영웅의 협곡(Canyon of Heroes)”에서 장엄한 오픈카 행진의 영광을 누렸다. 과연 그는 어떻게 불과 한 해전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비난의 화살을 열렬한 환영의 색종이로 뒤바꿀 수 있었을까?
당시 미국 정부의 관련 문서를 분석해 보면, 이승만의 극적인 “도발”을 미국 정가 주요 인물들은 어느 정도 예측했으며, 특히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은 모르는 척 눈감고 슬그머니 도와준 혐의가 있다. 1953년 5월 25일 클라크 장군은 다음과 같이 합참 본부에 쓴 보고문에서 남한 9개 수용소는 한국군이 실질적으로 관할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지금 [수용소 경비를 담당하는] 한국군을 미군 병력으로 대체한다면 민감한 상황을 오히려 더 악화시킬 것입니다. 만약 미군이 오직 공산 지배를 벗어나려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저지하는 강력한 작전을 맡게 된다면 매우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William Stueck,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333).
클라크의 이 발언은 당시 미국의 군부가 반공포로석방을 강력하게 막을 의지도, 명분도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로 클라크는 미군 병력이 반공포로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 발포하게 되면 이후 한미 양국 사이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그는 반공포로가 탈출을 시도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대량 학살의 우려를 사전에 인지하고, 수용소에 배치된 미군 병력을 향해 기관총·소총 등의 사용을 금지하고 오직 시위 진압 전술만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클라크에게도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클라크 장군이 고의적인 미온적 대처로 반공포로의 탈출을 묵인한 정황을 부인할 수 없다(Grace Chae, “”Complacency or Complicity?: Reconsidering the un Command’s Role in Syngman Rhee’s Release of North Korean pows,” The Journal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 Vol. 24.2/3 [2017]: 128-159).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이 막가파식 도발이 아니라 유엔군 사령부의 입장, 미국 정가의 분위기,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 아울러 한국군의 객관적 전력까지 다 따져 본 후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고서 감행한 정밀한 작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약소국 대한민국의 지도자 이승만에게 대체 무엇이 있었는가?
첫째, 이승만은 전쟁 중 유엔군의 명령을 듣는 대한민국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둘째, 그는 3년간 함께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유엔군 사령관의 암묵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셋째, 공산주의 세력에 완강하게 맞서는 이승만의 진정한 투혼은 미국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미국 의회에서 최소 여섯 명 이상의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을 지지했다.
1953년 8월 16일 당시 미국의 유력 석간지였던 워싱턴 “이브닝 스타(The Evening Star)”는 일요판 잡지 “선데이 스타(The Sunday Star)”에 이승만의 장문이 실렸다. 일요판 제1면 표지 맨 밑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사(an article of historic significance)”이란 설명과 함께 이승만의 “나는 왜 홀로 섰나?(Why I stood alone)”이 소개되었다. 이승만의 기고문은 7면 전면을 장식하고, 21면과 22면의 상단으로 이어진다. 편집인은 다음 문구로 이승만을 소개한다.
“훗날 역사는 이승만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많은 이에게 그는 한국의 평화를 지연한 완고한 사내이다. 다른 이들에게 그는 공산주의 세력에게 뮌헨 협정 같은 유화책을 쓰는 것에 반대했던 고독하고도 영웅적인 인물이다. 이번 주 잡지에선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 박사의 개인적 성명문을 특별히 독점적으로 게재한다. 당신의 평가가 어떠하든, 그가 이 글을 쓴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든, 지금도 진행 중인 우리 시대 역사의 일부로서 이 글을 읽고 싶어 할 것이다.”
이승만은 장문의 서두를 “반역적”이란 비난을 감수하며 아시아에서 공산 세력의 침략에 강력하게 맞선 자신의 투쟁이 1940년 나치 세력에 맞서 고독하게 싸운 윈스턴 처칠의 투쟁만큼이나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라는 당당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벼랑 끝 이승만의 비밀병기는 자유 투사(freedom fighter)의 도덕적 정당성이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한국 현대사 최고 명문 중 한 편이 아닐까. 다음 회에 이 글을 상세히 분석할 예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