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명씨를 처음 만난 것은 코로나 방역 체계가 단계별 일상 회복으로 전환되어 가던 2021년 연말이었다. A 선배가 도움이 필요하다며 급히 불러 나간 자리에서 그를 소개받았다. 1969년 2월 황해남도 연안 출생, 해주혁명학원 출신 ‘당 일꾼’인 부모의 2남 2녀 중 장남, 국가보위부 소속 운전사로 제대해 평양 시민증을 받았고 사업차 중국을 오가다 2017년 10월 탈북.
깡마른 체구에 눈빛이 날카로운 구대명씨는 A 선배와 나의 공개된 신상까지 꼼꼼히 파악하고 나온 터였다. 평소 북한 이탈 주민에게 관심이 많던 A 선배는 회고록 ‘거품1′을 읽고 2편이 언제 나올지 궁금해서 책을 펴낸 ‘명화(구대명씨의 아내 이름) 출판사’에 연락했는데 대표 번호가 저자의 휴대전화와 연결되어 있었단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랐지만 평양 평천구역에 28층 아파트를 건설하고 해외 무역에 종사했던 이력답게 셈이 밝아, 1인 출판사를 차려 만든 책을 포털 사이트 스토어에서 직거래로 팔아 마진을 최대화하려 했던 게다.
‘거품1′은 인기 유튜브 채널 ‘유미카’에 소개되면서 중쇄를 찍었다지만 비문과 오탈자가 많고 가독성이 좋지 않았다. A 선배와 나는 ‘거품2′가 바람대로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제대로 된 책의 꼴을 갖춰야 한다고 설득했으나 구대명씨에게는 원고를 되쓸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막노동과 택배 일로 모은 돈에 아파트 담보 대출까지 받아 북에 남은 가족을 데려오려 했지만 탈출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 원고는 ‘작가’라는 이에게 7백만원을 주고 초고를 맡겼다가 관계가 틀어져 계약금을 날린 후, 급히 교정자를 구해 150만원을 선금으로 주고 몇 달간 독촉하여 받아낸 것이기에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하루빨리 책을 펴내 북한 정권을 고발하겠다는 복수심과, 책을 많이 팔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조바심뿐이었다. 그는 남한에 와서 만났던 사기꾼들과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기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결국 그는 수정 개작(改作) 제안을 거절하고 두 달 뒤 ‘거품2′를 출간했다.
얼마 전 개봉한 매들린 개빈 감독의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를 A 선배와 동기 몇이 함께 보았다. 유토피아라고 믿었던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등장인물들 모습에 구대명씨, 그리고 그가 탈출시키려다 실패하여 정치범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은 가족들 모습이 겹쳤다. 10년 동안 무려 1000여 명의 탈북을 도운 갈렙선교회 김성은 목사의 헌신이 인상적인 한편, 탈북자 최초로 TED에서 강연하며 북한 사회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인권 운동가 이현서씨의 인터뷰 한 대목이 구대명씨의 ‘거품2′ 프롤로그를 상기시켰다.
“어떤 물건을 평가하려면 그와 유사한 물건이 있어야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중략)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철저히 통제되고 격리된 사회 속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놓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비교가 불가능했기에 완벽했던 유토피아! 애초에 유토피아의 어원이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이라지만, 허상의 유토피아를 벗어난 이들의 삶 또한 곤고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선을 뚫고 한국에 정착한 3만4000여 북한 이탈 주민이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그사이 출판사를 정리하고 전화까지 해지한 구대명씨의 소식을 수소문하니, 작년께 교포 여성을 만나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거품’을 영어로 출간해 아마존의 베스트셀러로 만들겠다던 야망을 어쩌면 조금씩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어디서든 어떻게든 행복하게 지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