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가 흥행에 시동을 걸고 있을 때, 도쿄 미나토구에 있었다. 팝아트의 거장 ‘키스 해링’전을 보러 모리미술관을 찾아가던 길인데, 지하철역 출구를 잘못 나온 바람에 뜻밖의 장소에 도착했다. 모리미술관이 있는 모리타워가 아니라 그 사촌 격인 모리JP타워, 그러니까 요즘 세계 건축계와 부동산업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도시 속의 도시’ 아자부다이힐스로 입성한 것이다.
이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영국 건축가 토머스 헤더윅이 설계에 참여했다는 아자부다이힐스는, 330m 높이의 모리JP타워를 비롯해 3개의 초고층 빌딩이 들어선 고밀도 복합 단지다. 1400가구가 거주하는 아파트에 오피스, 호텔, 쇼핑몰은 물론 병원과 학교, 미술관과 음식점까지 입주해 10분 이내 거리에서 일하고 배우고 먹고 잠자는 일상이 가능한 ‘콤팩트 시티’다. 뭣보다 두 발로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살바도르 달리의 출세작 ‘기억의 지속’을 모티브 삼았다더니 층과 층, 건물과 건물로 이어지는 동선이 초현실적이었다. 평지를 걷나 했더니 오르막이고, 지하 3층에서 문을 여니 지상이었다.
백미(白眉)는, 초고층 빌딩 사이의 여백을 점령한 7000평의 녹지였다. 가파른 언덕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계단식 정원엔 320종의 나무가 자라고, 중앙 광장엔 시냇물이 흘렀다. 행인들은 5000원짜리 크레이프를 하나씩 물고 요시토모 나라와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조각을 감상했다. 낮에는 2만명이 근무하고, 밤에는 3500명이 저녁밥 지어 먹고 잠드는 금싸라기 사유지를 일반 시민들이 공유하는 현장이었다.
뉴욕의 허드슨 야드와 함께 미래 도시의 모습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아자부다이힐스는, ‘상생의 개발’을 모토로 삼은 일본 부동산 개발 업체 모리빌딩 컴퍼니가 완공했다. 도시 과밀화 해법을 50층 이상의 수직 빌딩과 녹지 확보라는 투 트랙으로 풀어낸 모리컴퍼니는, 롯폰기힐스를 시작으로 도라노몬힐스, 아자부다이힐스를 탄생시키며 버블 경제 붕괴로 침체돼 있던 도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20~30년 걸린 개발 기간의 대부분을 원주민을 설득하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쏟아부었다는 사실이 가장 경이로웠다. 롯폰기힐스 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모리 미노루 회장이 무릎을 꿇고 “한 분이라도 재개발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일 없게 하겠다”고 호소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모리의 신화를 가능케 한 진짜 주역은 따로 있었다. 과감한 규제 혁파와 제도 개선을 단행한 일본 정부와 도쿄도(都)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가 도심 주요 지역의 고도 제한을 없애고 용적률을 두 배로 올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국가전략특구 프로젝트도 주효했다. 장기간 진행되는 도시 개발이 예상치 못한 규제와 금융 리스크로 중단되지 않도록 국가가 전폭 지원했다. 이전 주택과 새로 개발한 주택을 일대일로 맞교환하게 하는 ‘시가지 재개발법’은 대자본의 공세로부터 원주민을 보호했다. 롯폰기힐스, 아자부다이힐스 원주민의 대부분이 선대부터 살아온 터전에서 쫓겨나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이유다. 서울대 김경민 교수에 따르면 “공공과 민간이 협업한 도시 개발의 결정판”인데, 우리는 이걸 해내지 못해 ‘한국판 롯폰기’를 외쳤던 용산국제업무지구의 쓰라린 파산을 맛본 적이 있다.
도쿄에서 돌아와 영화 ‘파묘’를 봤다.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의 ‘좌파 영화’라는 비판엔 동의하지 않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심정이 이해가 됐다. ‘검은 사제들’ ‘사바하’를 만든 오컬트 장인이라더니, ‘파묘’는 허위로 판명 난 쇠 말뚝 낭설을 토대로 한반도 정기를 끊은 사무라이 혈괴를 때려잡는 친일 청산 스토리로 흘러갔다. MZ 무당 화림이 “일본 요괴는 한국 귀신과 달리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다더라”고 했을 땐 실소가 터졌다. ‘귀멸의 칼날’도 아니고. 그런데도 파죽지세 흥행을 이어간다.
시부야 스카이에서 내려다본 도쿄의 야경이 떠올랐다. 섬뜩할 만큼 활력이 넘쳤다. 일본 정부와 모리가 성공시킨 롯폰기 모델은 시부야, 신주쿠, 니혼바시 등 교통의 요지로 확장되며 도쿄를 천지개벽 시키고 있었다. 엔저(低)로 외국 관광객이 2000만을 돌파했다는 뉴스, 일본이 반도체 강국으로 부활하고, 부동산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보도엔 더더욱 주눅이 들었다. ‘모두를 위한 예술’을 선포한 키스 해링처럼 도쿄는 ‘모두를 위한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미래로 달려가는데 우리만 과거에 얽매여 신음하는 건 아닌지. 파내야 할 건 친일파의 무덤이 아니라 우리 안의 일본 트라우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