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을 앞두고 좌파도, 우파도 아닌 ‘대파’가 급부상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특가 판매하는 ‘875원짜리 대파’를 놓고 마트에서 나눈 발언을 앞뒤 맥락 자른 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후보들은 “5000원이랍니다. 5000원”이라며 ‘대파 인증샷’을 올리고 정권 심판론의 주요 이슈로 띄웠다. 자신의 이름과 동음인 정당으로 총선에 뛰어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정권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대파 때문에 망할 것”이라고 성토했다. 개인적 잘못으로 법의 심판대에 올라 있는 정치인들이 대통령 지지율이 낮은 정치 지형을 자신들의 법정 탈출의 천재일우(千載一遇)로 여겨 대파 높이 들고 의기양양 진군하는 모습은 한 편의 부조리극 그 자체다.
TV 개그 프로나 장터 광대극이라면 웃고 넘어갈 수 있다. 앞뒤 맥락이야 어떻든 티끌 같은 소재로도 권력자를 풍자하고 희화화하면 보는 이에게 카타르시스 효과는 있다. 문제는 한 해 600조원 넘는 나라 살림을 배분하고 법안 제·개정도 하면서 국민을 대표하겠다는 정치인과 정당이 이 수준이라면 희극이 아니라 국가적 비극이다. 집권 시절 정책 실패로 5억원 짜리 아파트를 10억원으로 치솟게 해 수많은 무주택자와 청년층을 벼락 거지 만들고 전세 사기 피해자를 쏟아냈던 정당이 정책 노선을 반성하고 제대로 된 공약을 고민하기는커녕 한술 더 떠 5000원짜리 대파 들고 민생 붕괴 운운하는 건 난센스다. 어째서 세계 속의 대한민국은 평판이 점점 높아지는데 ‘내수 상품’ 정치판은 갈수록 상식 이하의 인물과 해프닝으로 채워지면서 퇴보하는가.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은 서유럽 좌파 정당의 흥망성쇠를 집대성한 저서 ‘사회주의 100년’에서 사회민주주의로 뿌리내린 유럽 좌파 정당이 지난 100년 기여한 것은 “자본주의를 문명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복지 제도 확립에 기여했고 계몽주의의 진정한 계승자들이며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좌파의 근본 딜레마는 복지국가나 부의 재분배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강력한 자본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서순에 따르면, 좌파는 기본적으로 시장의 힘을 규제하되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선까지 규제해서는 안 되고, 국가 재원이 고갈된 이후의 공공 지출은 억제되어야 하며, 복지국가를 수호할 수는 있지만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집권 정당을 경험하면서 유럽 좌파는 급진적인 반(反)자본주의 상징을 내던지고 합리성의 틀 내에서 유지돼왔다.
우리나라 좌파는 왜 그런 길을 가지 않는가. 정치 지형이 지금 같은 좌우 갈등으로 본격 쪼개진 것은 노무현 정부가 분기점이다. 첫 진보 정권인 김대중 정부는 지역색은 강했어도 국가적 위기 수습에 전력했고 대일(對日) 외교 노선도 미래 지향적인 실용주의를 택했다. 후임 좌파 정부는 김대중 대통령의 유화적 대북 정책은 계승했지만 그의 실용적인 정책 운용은 이어받지 않았다. 오랜 세월 정치 자산을 쌓아온 3김 시대가 막 내린 후, 노무현 대통령은 386 운동권과 좌파 시민단체를 지지 기반으로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한 불의의 역사이고 보수 우파를 거악(巨惡)의 기득권으로 상정하는 운동권 논리를 받아들여 증오와 갈등을 정치 동력 삼았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을 겪었다”고 했다. 보수층을 비난하면 깨어 있는 시민으로 인정받고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받는 ‘좌파 비즈니스’가 지난 20년간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상수(常數)로 자리 잡았다. 그새 바뀐 건 주사파 운동권의 단골 메뉴였던 ‘반미·반정부’ ‘군부독재 타도’가 ‘반일·반기득권’ ‘검찰 독재 타도’로 앞 단어만 갈아끼운 채 반복 재생산 중이다.
이들이 합리적 좌파로 진보하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DNA를 가진 민주당 인사들은 이번 공천에서 ‘비명횡사’했다. 북한 문제는 입 닫고, 가상의 거악 앞에서 나나 내 편의 어지간한 잘못은 면죄부를 부여하니 입으로만 ‘정의와 민주’를 외치고 현실로는 편법·불법까지 동원해 빼곡히 이득 챙기는 사람들이 집결하는 도덕 불감증 정당이 되어간다.
대파 흔드는 야당의 총선 공약은 수준 이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 발언은 대파 한 단이 아니라 한 뿌리 값이었다”는 둥 “문재인 정부 때는 한 단에 7000원이었다”는 둥 ‘대통령의 대파 발언 엄호’에 여당이 매달릴 일도 아니다. 어차피 대파든 쪽파든 깻잎이든 뭐든 흔들면서 선전·선동을 해온 퇴행적 좌파는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경기가 좋거나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지지를 받으면 이런 세력이 확장되기는 힘들다. 대통령이 민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선동의 볼륨을 높이고 이삭 줍듯 표를 채간다. 대통령이 자신과 부인에게 엄격하고 절제하면서 민의에는 더 유연하게 귀를 열었더라면 고작 대파 한 단의 비방에 이리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당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대파 심판론’이 이번 총선에서 윤 대통령의 정치 성적표로 매겨지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