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으로 집에 도착한 이번 총선의 선거 공보물을 뜯었다. 정의·평등·공정·다양성 같은, 원래는 선량했지만 지금은 오염된 언어들이 가득하다. 요즘 젊은 세대가 소셜미디어에서 공유하는 반어와 풍자의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입시는 조국처럼, 대출은 양문석처럼, 증여는 공영운처럼.” 불법과 편법을 가로지른 이들은 보수에도 적지 않지만, 이들에게 특히 비난이 집중된 이유는 위선과 내로남불 때문일 것이다. 누구보다 큰 확성기로 이 가치 지향적 언어를 외쳐온 인물이고 정당이니까.
시작은 창대했지만 지금은 조롱의 대상이 된 언어로 또 PC(정치적 올바름)가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를 통해 알게 된 미국 아이비리그의 최근 소식이 이채롭다. 예일대와 다트머스대는 이번 입시부터 수험생이 다시 SAT 같은 표준화된 시험 점수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했다. 우리로 치면 자기소개서나 생활기록부 외에 수능 성적도 보겠다는 의미다. 그 배경에는 미국 엘리트 대학의 질적 하락에 대한 우려가 있다. 아니 그럼 지금까지 성적도 안 봤더냐고 우리 독자들은 놀랄지 모르지만, 코로나를 겪으며 미 명문 대학들은 눈치 보기를 계속해왔다. 능력이 미달하는데도 다양성을 이유로 무조건 뽑는 제도는 옳지 않다는 합리적 비판까지 PC 광풍속에 매도당했기 때문이다. 마침 지난해 미국 연방대법원이 흑인 히스패닉 아메리카 원주민 등을 입학에서 우대하는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이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예일과 다트머스가 아이비리그에선 처음으로 깃발을 든 것이다.
능력보다 다양성을 앞세운 미국 명문대의 학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뉴스는 종종 있었지만, 최근 공개된 몇몇 통계는 이 우려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급감한 세계 대학 순위가 있다. 영국 더 타임스는 매년 3만명 이상의 학자에게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 성과를 낸 대학을 추천받는데, 최근 10년간 미국은 추락했고, 중국은 점프했다. 하버드 비율이 6%에서 4.5%로 감소한 것을 필두로, MIT·스탠퍼드·버클리·프린스턴·예일·칼텍이 하나같이 떨어졌다. 중국 칭화대는 0.5%에서 1.5% 수준으로 세 배 가까이 올라갔고, 베이징대·상하이교통대·푸단대도 상승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상위 5% 과학 논문 저자도 이제 미국보다 중국이 많다.
미국 대학 질적 하락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지만, 교집합은 있다. 미국 대학은 PC를 존중하는 학생 육성에는 유능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이성적 논쟁과 학문의 질적 상승에는 관심이 줄었다는 분석이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통계가 있다. UCLA에 따르면 미국 학계에서 보수주의자가 증발하고 있다. 자신을 정치적 좌파로 생각하는 교수는 1990년 40%였는데, 2017년에는 60%로 늘었다. 중도는 23%, 우파라고 응답한 사람은 17%에 불과했다. 아이비리그는 더 심하다. 지난해 하버드대 학생 신문인 크림슨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하버드대 교수 중 자신을 보수라고 답한 비율은 3% 미만, 진보는 무려 75%였다. 그렇다면 같은 기간 미국 국민의 지지 정당은 어땠을까. 트럼프 당선과 재선 가능성으로 요약되는 미국의 현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학생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공부를 위해 대학을 가고, 관객은 공부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를 목적으로 극장에 가며, 대중은 위선과 내로남불이 아니라 내 일상을 낫게 해줄 정치인을 지지하는 법. 본령을 잊으면 신뢰도 잃는다. 중요한 건 공허한 명분이 아니라 실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