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9월 13일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 블라고베시첸스크 시에서 약 200㎞(125마일) 떨어진 치올코프스키 시 외곽 보스토치니 우주 비행장에서 가진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유럽 제국주의가 저물어가던 때 일이다.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힘을 합쳐 수에즈 운하를 확보하기 위해 1956년 이집트 침공을 단행했다. 이들의 시도는 2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 부활을 경계하던 미국을 경악하게 했다. 유엔의 중재 노력이 잘 먹히지 않자 미국은 보유한 영국 파운드와 국채를 내다 파는 한편 미국산 석유를 유럽에 지원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영국에 꼭 필요하던 IMF 구제금융을 무산시키겠다고도 압박했다. 위협을 느낀 영국은 결국 백기를 들었고 연합군은 철수했다.

이른바 ‘수에즈 철군’ 사건은 경제제재가 확전을 막은 그리운 추억처럼 회자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저지하려고 미국과 유럽이 2년여에 걸쳐 초유의 경제제재로 압박하고 있지만 효과가 시원찮기 때문이다. 러시아산 원유 가격에 시장가보다 훨씬 낮은 ‘배럴당 60달러’라는 상한을 씌우고 기계 부품 수출까지 금지하는 식의 촘촘한 제재는 유례 없이 광범위하다. 그런데도 최근 통계는 서방 제재가 러시아 억제 효과를 못 내고 있음을 드러낸다. 러시아의 지난해 경제성장률(IMF 기준 3%)은 G7을 전부 뛰어넘었고 유럽에선 1위였다. 러시아의 푸틴은 제재를 ‘역경의 서사’로 역이용하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서방은 쇠퇴한다”고 조롱한다.

러시아 뒤엔 ‘흑기사’를 자처하는 나라들이 있어 충격을 막아준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미국의 패권 독점에 반대하는 이른바 비동맹주의 국가들로, 중국·브라질·인도·인도네시아 등이 여기 들어간다. 이들의 세계 GDP에서 비율은 약 40%, 인구 기준으론 절반이 넘는다. 미국과 무역 분쟁 중인 ‘세계의 공장’ 중국은 러시아에 특히 든든한 뒷배다. 중국은 러시아에 필요한 제재 품목 대부분을 생산해 러시아에 수출해 줄 수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지난해 수출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약 2.7배로 급증했다.

수출이 금지된 전자 기기의 부품 또한 러시아로 계속 유입되고 있다. 급기야 미국산 반도체가 러시아 무기에 쓰인다는 증거도 여럿 공개됐다. 어떻게 된 일일까. 중앙아시아 친러 국가들이 수입한 물품을 러시아로 재수출하는 방식을 거친다고 추정된다. 이코노미스트는 “중앙아시아의 유럽 상품 수입은 2021~2023년에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상당수 물품의 ‘최종 도착지’가 어디인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제재를 무력화하는 러시아에 관한 기사를 최근 내보내면서 ‘서방 제재를 뛰어넘는 러시아, 여기를 주목하는 중국’이란 제목을 달았다. 뒤에 ‘그리고 북한’이라는 말이 추가돼야 할 것 같다. 핵 개발을 저지하려는 유엔의 제재 아래 있는 북한은 러시아에 포탄을 대주면서 핵·정찰 기술 등을 얻어내고 있다. 북한의 외화벌이 노동자가 중국의 수산물 가공 공장에서 일하고 바지락 등이 한국에 수출돼 버젓이 팔리고 있다는 사실도 최근 드러났다. 유엔 제재 정면 위반인데, 정부는 잘 모르겠다는 식이다.

미국서 금주법이 도입되자 불법 양조장이 성행했듯이 서방의 광범위한 제재는 ‘나쁜 나라’ 사이 거래에 불을 붙였다. 이들은 제재를 버텨내는 러시아를 보면서 ‘우리끼리 뭉치면 되는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난 한 주간 중국의 권력 서열 3위가 북한을 찾았고 러시아는 중국과 정상회담을 하는 일정을 발표했다. 북한의 지원에 답례하듯 러시아는 유엔의 대북 제재 ‘감시 카메라’ 역할을 하던 전문가 패널의 임기 연장을 최근 부결했다. 섬뜩한 움직임이다. 한국이 총선과 그 후폭풍으로 정신없는 중에도 이들은 결집을 다지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누군가는 급변하는 이런 정세에 대처할 전략을 치열히 짜고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