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역 인근의 한 건물에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공무원들과 유관 기관 관계자들이 모였다. 이날 ‘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을 본격 시작한다고 알리는 취지로 사업단 현판식을 열기 위해서였다.

국정 과제로 추진하는 이 사업은 국민 100만 명의 혈액·소변·조직 등 검체를 채취하고, 임상 정보와 유전체 정보 등을 통합한 바이오 빅데이터를 구축해 의료·산업·학계에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검체를 수집해 관리하는 일종의 바이오뱅크(Biobank)와, 이를 토대로 생산한 생체 정보를 관리하는 데이터뱅크(Databank)를 통합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정부는 2028년까지 1단계로 국비 6039억원과 민간 자본 26억원을 투입해 77만2000명의 바이오 빅데이터를 확보하고, 이후에는 100만 명까지 대상을 확대할 방침이다.

◇생활 습관까지 광범위한 수집

일반인(58만5000명)의 혈액과 소변 등은 검진 센터에서 채취하고, 희소·중증 질환자(18만7000명)의 암 조직 등 검체는 의료 기관이 수집한다. 두 경우 모두 참여자 동의를 받아 확보한다. 이 사업의 취지는 검체와 유전체 정보를 진료 내역 등 공공 데이터와 통합해 양질의 바이오 빅데이터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수집하는 정보가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예컨대, 건강 상태를 묻는 설문 항목과 검진 항목, 진단과 치료 정보뿐만 아니라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보유한 처방 내역과 접종 및 진료 내역 같은 공공 데이터도 수집한다. 여기에 더해 참여자가 직접 잰 혈당이나 혈압 정보, 심지어 스마트워치나 휴대폰으로 기록한 걸음과 수면 등 일상 정보(라이프 로그)까지 수집 대상에 포함된다. 정부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데이터 분석 결과를 당사자에게 제공해 질병 예방과 치료를 돕는다는 정도다.

그래픽=송윤혜

◇신약 개발과 맞춤 의료에 활용

정부가 이런 사업을 추진하는 이유는 바이오 빅데이터를 민간에 개방해 신약과 의료 기기 개발, 질병 예방과 개인 맞춤 의료 등에 활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이번 사업의 핵심으로 ‘오믹스 데이터’를 꼽는다. 이는 유전체·단백체·대사체·전사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유전 정보는 물론이고 단백질의 서열과 대사 물질의 종류, 발현되는 유전자의 종류까지 종합적인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분석하면 어떤 병에 걸릴 위험이 높은지 예측할 수 있고, 특정 유전자를 표적하는 치료도 가능해 ‘정밀 의료(precision medicine)’로 불리는 맞춤형 치료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세계 주요국이 유전체 등 데이터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프레시던스 리서치에 따르면, 유전체 시장 규모는 2024년 396억달러(약 54조원)에서 2032년 1642억달러(약 225조원)로 급증할 것으로 추정된다.

◇유전체 분석, 해외 의존 심해

문제는 ‘바이오의 반도체’로 불리는 유전체(게놈)를 분석할 국산 장비가 없다는 점이다. 30억 쌍에 달하는 염기서열을 분석하려면 전용 장비가 필요한데 국산화를 하지 않아 지금은 거의 100% 해외에서 들여오고 있다. 유전체 분석 장비 수입은 유지 보수와 운영, 시약 등 수반되는 비용 부담으로 이어진다. 하드웨어부터 소프트웨어까지 기술 종속이 심한 것이다. 대당 20억원에 육박하는 분석 장비와 유전체 분석에 쓰이는 시약 비용이 1인당 많게는 100만원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100만 명을 목표로 하는 이번 사업비의 일부는 해외 업체들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래픽=송윤혜

◇미·중 업체, 한국서 경쟁

현재 한국의 유전체 분석 장비 시장은 미국의 일루미나와 중국의 MGI 제품이 장악하고 있다. 이번 ‘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에서도 이 회사들이 물밑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의 미·중 유전체 분석 기업의 경쟁이 양국의 바이오 패권 전쟁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앞서 지난해 3월 미 상무부는 MGI의 모회사인 중국의 BGI(베이징 게놈 연구소)를 수출 제재 회사로 지정했고,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에는 미 상·하원이 ‘바이오 보안법’을 발의해 BGI와 MGI, MGI 자회사 컴플리트지노믹스를 ‘적대적 해외 바이오 기업’으로 명시했다. 미국의 정부 기관이 이 기업들로부터 바이오 관련 장비나 서비스를 조달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법안이 통과되면 이 기업들의 장비, 서비스를 이용하는 기업과도 정부 기관이 계약을 맺지 못하게 된다. 앞서 일루미나와 컴플리트지노믹스는 2010년부터 10년 이상 특허 분쟁을 벌였다. BGI는 미국 기업이었던 컴플리트지노믹스를 2013년 인수했는데, 미국 정부는 BGI의 인수를 통해 유전체 분석 첨단 기술과 민감한 데이터가 중국에 유출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미국의 바이오 보안법에 대해 일각에서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반도체에서 바이오 분야로 확전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이 중국 바이오산업의 빠른 성장을 경계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바이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이번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에서 유전체 등 분석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며 “중국이나 미국 회사의 분석 장비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민감한 생체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18년 전 시작한 英, 연구 성과 잇따라

외국의 바이오뱅크 중에는 영국이 2006~2010년에 40~69세 50만명을 대상으로 생체 정보를 수집해 만든 ‘UK바이오뱅크’가 가장 많은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인지 능력 감소 등 뇌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UK바이오뱅크 데이터 분석으로 밝혀냈고, 비만 억제와 관련된 유전자 변이도 찾아냈다.

지난해부터는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유전 정보는 물론이고 임상 데이터까지 공개 범위를 확대해 UK바이오뱅크를 활용한 연구 결과들이 사이언스 등 국제 학술지에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지난달에도 UK바이오뱅크 참여자 24만명의 수면 시간과 식습관, 당뇨병 등을 11년 이상 추적 조사해 수면 부족이 당뇨병 발병 확률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은 2018년부터 ‘올오브어스(All of Us)’라는 이름으로 바이오뱅크를 구축 중이다. 지난해까지 69만명을 모집했고 2026년까지 100만명 데이터를 확보한다는 목표다. 핀란드는 온 국민의 10%에 달하는 50만명의 유전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핀젠(FinnGenn)’ 프로젝트를 2017년부터 하고 있다. 이처럼 주요국이 자국민 대상 바이오 빅데이터를 구축하는 이유는 환경과 인종에 따라 유전적 특성이 다른 점을 고려해 고유의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자국민에게 최적화된 신약과 의료 기기를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바이오 빅데이터가 글로벌 헬스케어 시장 선점에 필수적인 국가 전략 자산으로 여겨지는 배경이다. 또 정부가 주도해 바이오 데이터를 통합하는 것에는 질병을 조기 예방하면 고령화 시대 의료 재정을 절감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