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로 이름난 가수 A가 밥을 먹다 말고 물었다. “학전 김민기 형 다큐 봤어요?” 며칠 전 항암치료 중인 김민기(73) 문병을 다녀왔다고 했다. 형의 머리카락이 빠지고 발끝은 시꺼멓게 죽었다며, 여섯 살 아래 늙은 동생이 눈시울을 붉힌다. 내일(5일) 마지막 회를 방영하는 SBS 3부작 다큐스페셜의 제목은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뒷것’은 김민기의 별명이다. 배우와 가수가 앞에 서야 하고, 자신은 커튼 뒤 뒷것에 불과하다는 겸손이다.
배울 학(學) 밭 전(田), 배움의 밭. 재정난으로 지난 3월 문 닫은 김민기의 소극장 학전은 말 그대로 문화예술의 못자리였다. 배우 김윤석·설경구·황정민·이정은·조승우, 가수 김광석·나윤선·윤도현…. 모두 이 밭에서 자라 큰 무대로 갔고, 성공했다. 그 자신 ‘아침이슬’과 ‘상록수’의 싱어송라이터였지만, 김민기는 늘 뒤에 숨었다. 신인들이 유명해지면 내보내고, 다시 모를 심었다. A가 김민기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라고 말하는 연출자·제작자는 부지기수지만, 실제 삶에서도 실천하는 인물은 ‘형님’밖에 본 적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세상은 ‘뒷것’에 별 관심이 없다. 지난 몇 주간 대중의 관심은 세 고유명사로 압축된다. 방시혁 민희진 그리고 뉴진스. 대부분의 화제를 빨아들인 블랙홀이다. 엔터테인먼트만의 관심이 아니었다. 페이스북이나 X(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 저마다 글 좀 쓴다 하는 인사들이 앞다퉈 ‘참전’했다. 정치와 경제, 외교안보가 주 전공이라 자처하는 필자까지 백화제방(百花齊放), 거의 ‘천하제일 백일장’ 수준이었다.
덕분에 아이돌과 K팝을 모르거나 관심 없던 중장년 남성까지도 이제는 이 주제를 소비한다. 민희진은 걸그룹 뉴진스의 총괄프로듀서이자 하이브 자회사 어도어의 대표. 하이브가 민 대표에게 경영권 탈취 의혹을 제기하고, 상대가 반박하며 사태는 시작됐다. 물론 누구 말이 더 맞는지는 법적 판단이 남아있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춤추게 만드는 분홍신, 아니 마법의 파란 모자라도 쓴 것이었을까. 개저씨와 내새끼를 가로지르며 두 시간 넘는 폭포수를 쏟아낸 민희진의 ‘광기의 기자회견’ 이후, 그는 무대 뒤 ‘뉴진스 엄마’가 아니라 스스로 주인공이 됐다.
진정성 있다, 시원시원하다, 정말 일밖에 모르는 사람 아니냐, 사장에게 할 말 다 하는 직장인 로망이다.... 이 논리하에서 배은망덕한 통제 불능 월급쟁이는 창업자보다 더 잠재성 있고 유능한 직장인 대표로, 탐욕스러운 자본가에게 핍박받는 무사무욕의 K팝 장인(匠人)으로, 술 먹고 골프나 치는 아빠로부터 딸과 가정을 지킨 엄마로 거듭났던 것이다.
물론 세상에 100대0의 진실은 없고, 이런 평가에도 적지 않은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의 불이 꺼지면 초라한 현실이 드러나는 법. 민희진과 방시혁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뉴진스의 전속 계약과 주식을 둘러싼 갈등, 방탄소년단까지 방패막이로 내세웠다는 논란에 이어 3일에는 일본 시부야에서 보이그룹 세븐틴의 신곡 앨범이 쓰레기로 대량 투기됐다는 외신까지 이어졌다. 설립자와 자회사 대표는 소음과 잡음의 주인공이 됐고, 정작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아티스트는 방치되고 버려졌던 것이다.
지난해 3월, 방시혁 의장이 중견 언론인 모임 관훈클럽의 토론회에서 했던 발언을 기억한다. SM을 놓고 카카오와 ‘머니게임’을 벌이다 인수 포기를 선언한 직후였는데, “아티스트와 팬이 이렇게 괴로운 상황이 되는 게 맞는가라는 고민이 있었다”는 멋진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1년 뒤 이 발언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줄, 그는 알았을까. 시가총액 10조 가까운 엔터 기업과 가난한 소극장을 같은 줄에 놓을 수는 없겠지만, 묵묵히 무대 뒤를 지킨 ‘뒷것’ 김민기가 떠오르는 5월의 첫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