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32회>
외국에 살면서 한국 정치판을 관망하노라면, 언제 어디서 또 무슨 기괴한 이슈가 터져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지 않을까 가슴이 조마조마할 때가 있다. 가짜뉴스와 거짓 선동이 국정을 마비시키고 정권을 뒤흔드는 사례가 어디 한두 번이었나? 휘발성 강한 선정적 이슈가 들불처럼 일어나면 다수 대중이 균형감각을 잃고서 일제히 한 방향으로 획 쏠리는 현상이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구체적 사례를 거론하지 않아도, 지난 세월 꾸준히 한국 정치판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머릿속에 몇 가지 사건들이 떠오르리라. 세월이 조금만 지나면 망각의 늪에 잠기고 마는,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그때 무엇 때문에 그토록 흥분했었나?” 그 이유조차 알기 힘든 그런 사건들 말이다.
얼마 전 70년대 중반부터 외국에 체류해온 80대의 교민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내게 물었다. “우리 한민족은 왜 그토록 정치 선동에 잘 넘어갈까요?” 글쎄, 딱히 한 가지 이유만을 꼽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한국 정신사의 밑바탕에 깔린 주자학적 관념성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자학적(朱子學的) 관념성이란 우주의 섭리나 자연의 질서나 인간의 도리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를 논하면서 자연 세계에 관한 과학적 탐구나 인간 현실에 관한 경험적 조사도 없이 오직 머릿속으로만 리(理)와 기(氣) 같은 거대 개념에 의지하여 과대한 일반론을 펼치는 원리적 사유 습관을 이른다.
누구든 주자학적 관념성에 빠지면, 구체적 사물에 대해서 스스로 하나하나 따지며 탐구해 보지 않고서도 보편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변적 망상에 사로잡힌다. 바깥 세계로 향한 경험적 탐구 없이도 내면적 관조(觀照)만으로 우주적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동양철학”의 득도(得道) 문화가 아직도 한국 지성계에 만연해 있는 듯하다. 경험적 탐구가 얕아도 도(道)를 터득할 수 있고, 실증적 검토 없이도 리(理)를 깨달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힘들여 발품을 팔고 고된 땀을 흘리겠는가? 그러한 믿음이 널리 퍼진 사회에서는 정치 선동이 쉽게 먹혀들 수밖에 없다. 21세기 20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선 주자학의 기본 명제를 되짚어 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외면하면 진리가 보이는가?
지난 회 “슬픈 중국”에선 주자학(朱子學)의 몰역사성을 비판했다. 주자학의 비조(鼻祖) 주희(朱熹, 1130-1200)는 왜 역사적 탐구를 경시했을까? 학자들에 따라서 생각이 다소 다르겠지만, 가장 간단명료한 대답은 주자학의 궁극 목적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주자학의 목적은 경제성장이나 군사력 확충 따위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닦는 도덕·수양에 있었다. 주희는 인간의 가장 큰 의무가 인욕(人欲)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것이라 여겼다.
주희는 미성숙한 인간이 섣불리 역사책에 빠지면 도덕·수양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저버릴까 우려했다. 역사책 속에는 비루한 인간들의 권모술수와 반인륜적 작태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악한 기질(氣質)이 천태만상으로 펼쳐지는 역사의 무대에 혼을 팔지 말고 위대한 옛 성인(聖人)의 거룩한 행적이 제시된 경서(經書)를 숙독하라는 당부였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고양되기 위해선 저열한 소인(小人)의 악행 대신 고상한 군자(君子)의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정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지 않는 자가 현명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인류사의 갖은 죄악을 직시하지 않고서 인간 본성을 논할 수 있는가? 역사 현실을 떠나서 과연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가? 경험적 탐구 없이 지혜로워질 수 있는가?
물론 주희도 구체적 일용사물에서 원리를 궁구하는 “격물(格物)” 공부를 중시했으나 실제로는 경험적 탐구를 경시하는 모순된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주희를 정신의 스승으로 숭앙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은 주희보다 더 극단적으로 경험적 탐구를 멀리 한 채 우주적 섭리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순수사변적 논쟁에 빠져들었다.
격물(格物) 없는 치지(致知)
동아시아 사회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익숙히 아는 유교의 경구가 있다. 바로 수신(修身)·제가(齊家)하고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하라는 말씀이다. 이 경구 속에는 인격을 도야하고, 집안을 바로잡고, 국가를 통치하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원대한 유학의 이상이 담겨 있다. 사서(四書) 중에서도 특히 중시되었던 <<대학(大學)>> 서두에 실린 이 경구의 각 항목은 이른바 8 조목(條目)의 5·6·7·8항에 해당한다. 신분적 위계질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직분과 권한이 명확한 전통사회에서 치국의 임무와 평천하의 이상은 실상 통치자나 고위 관리에 해당할 뿐, 서민이나 지방 사인들에겐 직접 관련된다고 하기 어렵다. 1·2·3·4항은 각각 정심(正心), 성의(誠意), 격물(格物), 치지(致知)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궁리진성(窮理盡性)이 주자학의 공부 방법이다. 격물치지란 자연계의 물리적 대상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의 구체적인 일용사물(日用事物)에 서려 있는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여 스스로 깨닫는 주자학 특유의 공부 방법이다. 궁리진성이란 천리를 궁구하여 실천적으로 인간이 타고난 선한 본성을 다한다는 <<주역(周易)>><설괘전(說卦傳)>의 경구다.
주희는 그 어떤 공부보다 격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희에 따르면, “무릇 하나의 물(物)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의 리(理)가 있으니 그것을 끝까지 궁구함이 바로 격물이다.”(<<朱子全書>><大學或問>, 凡有一物, 必有一理, 窮而致之, 所謂格物者也). “물”의 의미에 관해서 주희는 “천지 사이에서 눈앞에서 접하는 모든 일(事)이 다 물(物)”이라고 정의한다. (<<朱子全書>>16冊<朱子語類>“孟子”離婁 下: “凡天地之間, 眼前所接之事, 皆是物.”)
주희가 말하는 물은 1) 외부 세계의 사물(事物, things), 2) 인간 사회의 사건(事件, events), 3) 내면세계의 현상(現像, phenomena)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물(物)을 향해 나아가는” 격물은 앎의 극치로 나아가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로,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궁리(格物窮理)의 공부로 나아간다. 이론적으로는 격물은 모든 현상의 이면에서 작용하는 존재론적(ontological), 가치론적(axiological), 우주 발생론적(cosmogenic) 원인 및 법칙을 밝히는 원리적 궁구(窮究), 경험적 탐구(探求), 도덕-형이상학적 논구(論究)라 할 수 있다. 실천적으로는 격물은 선악을 판별하고, 시비를 분별하고, 인욕을 제거하는 모든 도덕적 사유, 내성적(內省的) 반성 및 자아 계발의 정신적 활동이다.
그렇듯 주희는 스스로 격물을 구체적 대상에 관한 경험적 탐구에서 시작된다고 정의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주자학은 경험적 탐구를 경시하고 멀리했다. 입으론 격물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격물을 외면했다. 격물치지라 하고선 격물 없는 치지를 추구했다. 주자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격물치지를 강조했지만, 과연 그들이 물리적 대상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탐구하지 않았다. 생활세계에서 벌어지는 복잡다단한 윤리의 문제와 도덕적 갈등 상황을 캐묻고 따지는 도덕적 추론(moral reasoning)도 정교하게 발전하지도 않았다. 주자학은 유가 경전에 근거한 철저한 관념적 사유였다. 물론 주희 역시 자연학적 탐구를 외면하진 않았으나 주자학의 격물은 자연과학적 탐구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점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더 깊이 파헤쳐 보기로 한다.
조선 주자학, 관념성이 더욱 강화
그러한 주자학이 조선에 들어와서 관념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선비들은 오매불망 주자(朱子)를 흠모했지만, 그들은 정작 중화 문명의 역사와 지리와 언어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객관화하여 탐구하지 않았다. 대체로 그들은 유가(儒家) 경전에 의존해서 이상화된 “중국”의 가치를 좇았을 뿐이다. 물론 모든 조선 유생이 중국 역사에 무관심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규장각, 장서각,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고도서(古圖書)를 전수 조사하여 찾아낸 조선 학인(學人)의 중국사 연구의 독립 저작은 46종에 불과했다. 그 46종 역시도 중국에서 수입된 역사서를 간추려 요약하거나 편제를 바꿔 기술한 소략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민두기, 오금성, 이성규, “조선학인의 중국사 연구의 정리 및 평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1980).
중국 역사를 탐구하려면 중국 역대 왕조가 공식 제작한 역사서에 국한돼선 안 된다. 직접 중국 땅을 밟고서 방방곡곡을 누비며 민간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다양한 문서를 발굴하여 중국인의 삶을 실질적으로 탐구하고 기록해야만 한다. 그 점에서 수천 년 강력한 중화 문명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반도의 학인들은 중화 문명을 경험적으로 탐구하지 않았다.
조선 학인들과는 달리 16세기 이래 영국의 지식인들은 본격적인 중국 연구를 시작했다. 영국 런던 대학교 동양학·아프리카학 대학(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도서관에는 1550년에서 1850년까지 300년 동안 간행된 900종이 넘는 중국학 관련 전문 서적들이 쌓여 있다. 여행기, 선교사 기록, 학술 저작 등등 여러 주제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저작들이다.
그중 몇 가지 중요한 작품만 소개하면, 1738~1741년 간행된 두 할데(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의 <<중국 및 중국-타르타이 제국에 관한 묘사(A Description of the Empire of China and Chinese-Tartary>>는 제수이트 선교사들의 보고서에 기초하여 중국의 지리, 역사, 문화에 관한 상세한 기술을 담고 있다.
1836년 출판된 휴 머레이(Hugh Murray)의 <<중국 역사 서술기(An Historical and Descriptive Account of China>>는 중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을뿐더러 서구의 무역과 외교가 중국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한 역작이다. 1848년 출판된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웰스 윌리엄스(Samuel Wells Williams)는 <<중국(The Middle Kingdom)>>은 지리, 정부, 교육, 사회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폭넓게 중국을 탐구한 중요한 저서이다.
이들 저서는 유럽인들이 직접 중국을 찾아가서 발로 뛰고 몸으로 부닥치고 손으로 만져가며 일궈낸 경험적 탐구의 결과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서술한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수천 년 중화 문명의 영향권 속에 있었던 한반도 학인들은 왜 유럽인들처럼 경험적 탐구에 근거한 독자적인 중국 연구서를 저술하지 못했을까?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다(不出戶, 知天下)”는 도가적(道家的) 교만 때문이었을까? 주자학적 관념성 때문이었까? 격물 없는 치지(致知), 역사 없는 철학, 검증 없는 주장, 내용 없는 형식, 회의(懷疑) 없는 반성(反省)······ 그러한 조선 주자학자들의 사유 방식이 아직도 한국의 정치문화를 지배한다면 과언일까? 그래서 한국인들이 “미국소=미친소”와 같은 정치 선동에 허망하게 넘어간다면 무리한 분석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