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전 전남 나주시 한 장례식장에서 얼차려 중 쓰러졌다가 이틀 만에 숨진 훈련병에 대한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자식을 군대 보낸 엄마들이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눈물의 입소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코로나 시기에 아들이 입대했기 때문이다. 신병 훈련소 앞에 아이만 떨구고 가라는 지시가 서운해 차에서 내렸다가 군인의 제지를 받았다. 백미러 속 멀어져 가던 까까머리 아이들은 부모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못한 채 거대한 철문 안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배달된 아들의 사복(私服)을 끌어안고 통곡한 건 아니다. 호기로운 예비역들 말마따나 제3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도 아니니까. 다만 5주의 훈련 기간을 포함해 1년 6개월 아들의 군 복무를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국가는 왜 개인의 자유를 나라에 헌납한 젊은이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지 않을까?

국방의 의무를 당연하다 못해 신성하다고 여길 산업화 세대들은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게 요즘 이십대 남성과 부모들 생각이다. 해병대 채 상병 죽음을 비롯해 일련의 군 사망 사건이 현 정권의 지지 기반을 흔들고 있는 것도 이걸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태생적으로 MZ세대는 징병제와 상충한다. “이걸요? 제가요? 왜요?”라며 달려드는 세대에게 ‘닥치고 충성’을 요구하는 건 그래서 어렵다. 초면의 부사관이 반말을 하고, 사람에 번호를 매겨 명령하며, 화장실도 맘대로 못 가게 하는 훈련소가 교도소와 뭐가 다르냐며 따지는 세대다. M16 소총이 아닌 탄도미사일로 싸우는 디지털 시대 병사들을 이끌 리더십부터 혁신해야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깐다면 깐다’를 외치는 석기시대 병영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최근 강원도 인제 12사단에서 벌어진 훈련병 사망 사건만 해도 군대가 언제까지 모멸감과 수치심을 주는 방식으로,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식으로 MZ 병사들의 기강을 잡고 훈육할 것이냐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훈련병을 군인이기 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했다면, 20kg 넘는 완전군장에 다리 근육이 녹아내려 거품 물고 쓰러질 때까지 달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신 나간 한 중대장의 과실치사로만 볼 수 없다는 건, 채 상병 순직 사건에서도 목격했다. 귀신 잡는 해병대이기 전에 한 가정의 귀하고 귀한 아들이라고 여겼다면 장갑차도 버거워한 물살에 안전로프도, 구명조끼도 없이 병사들을 하천에 투입하진 않았을 것이다.

군대에서 ‘일개 병사’는 사고로 죽을 수 있다는 인식을 예사로 하는 것도 문제다. 가혹 행위로 숨진 훈련병 장례식날 22대 의원 연찬회를 연 여당도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일개 훈련병’의 죽음이니 왁자한 건배와 구호, 대통령의 어퍼컷이 나와도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국가엔 일개 병사일지 몰라도, 부모에게는 이 세상 전부이고 우주다. 술이 돌기 전 짧게 묵념이라도 했다면 ‘가짜 보수’ 소리는 듣지 않았다. 북한 주민의 인권은 안타까워하면서 우리 병사들 인권 문제는 왜 매번 진보의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역공당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난해 채 상병이 순직했을 때 ‘스무 살 병사들 얼마나 더 희생해야 대한 강군 될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좌경화된 기자’라는 비난과 함께 ‘군과 국민을 이간질하지 말라’ ‘당나라 군대가 돼도 좋다는 거냐’ 같은 악플이 여럿 달렸다. 일개 병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 좌익인지도 의문이지만, 욕설과 얼차려, 폭력과 의문사가 횡행했던 왕년의 군대가 강군(强軍)이었다는 그들의 확신은 무엇에 기반한 건지 궁금했다. 이런 인식은 의외로 만연해서 과학과 창의로 무장해야 할 21세기 한국 군대와 젊은 장교들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있다.

총기를 다루는 군대에서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지휘관의 어리석은 판단과 오만으로 병사가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 불행히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은폐하지 말고 즉시 사과해야 한다. 책임자를 엄중 처벌해야 한다. 가혹 행위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중대장을 엄벌하고 걸러내지 못한 군이야말로 당나라 군대다.

잘못했는데 훈육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훈련 강도를 낮춰 달라는 것도, 월급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다. 분단된 조국을 지키는 일에 병사들이 자부심을 느끼게 해달라는 것뿐이다. ‘우리는 개목걸이(인식표) 한 군바리’라고 자조(自嘲)하지 않도록, 일개 중대장의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젊은 층, 중도층을 파고들며 건국 대통령에 대한 자부심,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해줬다는 영화 ‘건국전쟁’의 공(功)이 물거품 되고 있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