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릴랜드 대학병원의 심장이식 전문 의사가 발명가 토머스 클레멘트(71)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인간에게 돼지 심장을 이식한 후 약물 투입 방식을 이야기하던 때였다. 빨대로 음료수를 마시던 토머스가 말했다. “빨대로 음료수를 빨듯, 공기로 심장 판막을 들어올려 주사제를 넣는 건 어때?” 얼마 전 병원은 이 기기로 미국 의료기 발명 대회에 출전, 1등상을 수상했다. 토머스는 60개가 넘는 기술 특허 보유자이고, 의료기 회사를 글로벌 기업에 매각해 큰 돈을 벌었다. 제너럴일렉트릭(GE) 기술자였던 양아버지는 그를 “내 평생 최고의 선택”이라 했다.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버려진 그는 5세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얼마 전 방한한 그가 “귀국한 입양인들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가 큰돈을 기부했지만 그것으론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중년이 된 해외입양인들이 돌아온다’(7일 자)는 기사로 썼다.

입양인 사정은 천차만별이었다. 네덜란드 출신 시모나는 소녀 가장, 여성 전사처럼 살고 있다. 시민 단체를 꾸려 입양인에게 푸드박스를 보내고, 집을 리모델링해주고, 월세를 내준다. 같은 나라 출신 창우씨는 직업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한다. 두 사람 모두 삶이 녹록지 않은데, 그래도 한국에 사는 게 좋다고 했다.

어느 전문가가 이런 말을 했다. “유엔 표결이 있을 때였다. 북한과 가까운 유럽 국가들에 우리 쪽에 표를 주지 않으면 입양을 보내지 않겠다고 을러서 표를 받았다”고 했다. 지독히 가난했던 50년대가 아니라 80년대 출생아의 1%인 8,000명 이상의 아이를 해외 입양 보냈다. 한국은 입양아를 ‘외교 무기’로도 썼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해외로 아이를 보낸다.

운동가들은 이걸 두고 ‘영아 매매’ ‘인신 납치’라 부른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버지의 나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혼혈아를 해외로 보낸 건 인종 청소였다” “건당 3000~3만달러에 정부가 아이를 팔아 넘겼다.”

동의하지 않는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않는다”며 국내 입양은 하지 않던 나라였다. “미국에서는 거지도 햄버거를 먹는다” “영어라도 잘하게 외국 입양 갔으면 좋겠다”는 농담까지 있던 나라였다. ‘해외 입양 환상’은 지위 고하를 막론, 모두에게 있었던 나라였다.

과거에 대한 진단은 다르지만, 해법은 비슷할 수 있다. 이민은 의지였지만, 입양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양인이 한국에 오면 ‘재외동포비자(F4)’를 발부받는다. 여기서 살며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정부나 지자체 ‘지원금’을 받지 못한다. 청년주택이나 문화바우처 같은 것은 어림없는 소리다.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력이 낮거나 한국말도 못하는 사람이 많아 합법적 취업은 어렵다. 그런 사람 수백 명이 지금 한국에 산다.

물론 ‘국적 회복’ 과정을 밟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해외 입양인은 한국국적을 회복하려면 외국국적 행사를 포기해야 한다. 이제 중년, 노년이 된 그들의 자손들은 한국 국적과 관련한 ‘지름길’도 없다. 입국 후 가난과 비행 등의 이유로 국적회복과정에서 탈락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특별한 ‘루트’를 열어줘야 한다. 탈북자나 고려인 후손에 비해 ‘입양인’이 홀대받을 이유가 없다. 그들을 ‘입양 시스템의 피해자’로 남겨둬선 안 된다.

시모나가 이렇게 반박했다. “나는 피해자(victim)가 아니다. 과거를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고칠 수 있다는 얘기다. 입양인들은 그 나라 언어에 능통하고, 인적, 사회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한국이 우리를 시민으로 인정하고, 취업 지원을 해서 활용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한국은 초저출산 국가라 엄청나게 걱정하지 않나. 왜 우리는 안 보이는 건가.” 그녀에게서 한 수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