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입자를 감지해 세상의 속도를 높인 연구자”로 평가받는 남세우는, 세계 양자물리학계 스타였다. 양자 기술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감도로 빛을 탐지하는 ‘단일 광자 검출기’를 개발해 양자 컴퓨팅, 양자 통신 분야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한 그는, 이 분야 최고 권위인 ‘존 스튜어트 벨 상’을 받은 데 이어, 2022년 노벨 물리학상에 인용됐다.
그가 지난 1월 5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 물리학계는 슬픔에 잠겼다. 남세우가 25년 몸담아온 미국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는 “우리는 뛰어난 과학자, 사려 깊은 멘토, 훌륭한 친구를 잃었다”며 “세계 물리학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고 애도했다.
남세우는 사후(死後) 그 이름이 모국에 알려졌다. 호암재단(이사장 김황식)은 생존하는 사람에게만 시상한다는 원칙을 깨고 남세우를 ‘삼성호암상 물리·수학 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 지난 31일 시상식에 참석한 아내 킴벌리 브리그먼 박사와 NIST 동료 과학자 6명에게서 모국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남세우 박사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남 박사를 “고집은 셌지만 유머가 넘치고 한없이 겸손했던 과학자”로 추억했다.
◇ ‘세상의 속도’를 높인 물리학자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들 자비로 왔다고 들었다.
제임스 쿠시메릭: “NIST와 남세우 박사를 대표해서 왔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할 킴벌리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
-호암상을 알고 있었나?
킴벌리 브리그먼: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이메일을 정리하다 수상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발견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 NIST 동료인 황지성 박사에게 물었더니 진짜라고 확인해주더라(웃음). 남편의 외삼촌인 김충기 전 카이스트 교수가 31년 전 호암상을 받은 인연이 있어서 남편 또한 매우 영예롭게 생각했을 것이다.”
-한국에선 남세우 박사를 잘 모른다. 그의 업적을 설명해주신다면.
크리스터 샐름: “우리는 빛을 통해 세상을 인지한다. 빛의 가장 작은 단위를 광자(photon)라고 하는데, 빛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 광자를 99% 탐지하고 측정하는 기술을 남 박사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기술은 물리학의 기초 영역부터 모든 응용 분야에 적용되며 엄청난 파급을 일으켰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활용되나.
크리스터: “양자 컴퓨터, 양자 통신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된다. 인간의 두뇌를 모방하는 ‘뉴로모픽’ 컴퓨팅, 우주 암흑 물질 탐색, 보안 통신에 사용되는 ‘양자 키’ 처리에도 활용된다. 특히 지구와 위성, 우주정거장 간의 통신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고 안전한 방식으로 정보를 보낼 수 있다.”
리처드 미린: “우주, 국방, 자동차, 보안 산업을 비롯해 의학 영상 기기에도 단일 광자 검출 기술이 사용된다.”
-스탠포드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 이 연구를 처음 시작했던데.
킴벌리: “스탠포드대학의 블라스 카브레라 교수 밑에서 우주의 암흑 물질을 찾는 초전도 탐지기를 개발했고, NIST로 오면서 초저온에서 작동하는 초전도 고효율 검출기를 개발해 충돌하는 모든 광자의 99%를 탐지해내는 데 성공했다.”
-20년에 걸친 연구였던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황지성: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장애가 발견되고 한계에 부딪히지만 남 박사는 이를 해결하고 넘어서는 능력이 탁월했다. 작은 혁신들을 시도했고, 그것들이 쌓여 커다란 혁신을 이뤘다.”
◇ 물리학 50년 논쟁에 종지부
-남세우 박사의 단일 광자 검출기는 2022년 노벨 물리학상에도 인용됐다.
앨런: “알랭 아스페, 존 클라우저, 안톤 차일링거는 세계 물리학계의 50년 논쟁거리였던 ‘벨의 정리(Bell’s Inequality Theorem)’, 즉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을 증명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떨어져 있는 두 입자가 서로 강력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양자 얽힘’ 이론은 아인슈타인, 보어, 슈뢰딩거 등 위대한 물리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를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남세우 박사의 단일 광자 검출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어야 하지 않을까?
킴벌리: “노벨상을 받기에 남편은 너무 젊었던 것 같다(웃음). 오히려 남편은 2010년부터 광자 탐지 칩과 시스템을 제공하며 긴밀히 협력해온 오스트리아의 안톤 차일링거 박사팀이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것을 무척 기뻐했다. 자신이 기여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리처드: “남 박사는 답을 찾기 위해 과학을 하지, 상을 받기 위해 과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크리스탄 코윈: “그는 과학계의 협력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경쟁하는 그룹에게도 자신의 기술을 기꺼이 공유했다.”
◇ 경쟁 그룹과도 기술 공유
-국적이 다른 여러 연구 그룹과의 협업이 활발했더라.
앨런: “보통 과학자들은 자기만의 좁은 아이디어에 국한해서 연구하는데 남 박사는 단일 광자 검출부터 핵전이에 이르기까지 워낙 넓은 범위를 연구하다 보니 콘퍼런스를 하면 1만명이 모였다. 그래서 실험실에선 세우와 페이스를 맞추려 하지 말라고, 그러면 다친다고 경고했다(웃음).”
크리스탄: “세우는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뭣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과학자들이 모이면 ‘세우와 널 비교하지 마라’며 서로 위로한 뒤 일을 시작했다(웃음).”
킴벌리: “남편은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더 빨리, 더 정확히, 더 노력하라고 외쳐서 동료들이 힘들었을 것이다(웃음).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할 때도 남편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한 코로나 바이러스 검출기를 개발했다. 바이러스 노출 여부를 스스로 감지하게 해주는 장치였다.”
-일중독이었을까?
킴벌리: “남편은 자신의 일에 5가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첫째, 열심히 한다. 둘째, 너무 작아서 할 수 없는 연구란 없다(No task was too small to do). 셋째, 공유(sharing)와 다양성이 현장(field)을 더 좋게 만든다. 넷째, 다른 연구자들을 북돋고 신뢰하자. 다섯째, 재미있게 일하자.”
-한국 물리학계와도 협업했을까?
킴벌리: “초고효율 단일 광자 검출이 굉장히 특수한 분야이고 거기에 쏟을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협업을 요청해온 과학자들과만 교류한 것으로 안다.”
크리스탄: “한국은 양자 과학이 초기 단계라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지성: “한국에도 훌륭한 물리학자들이 많다. 남 박사의 수상으로 양자 과학이 좀 더 조명받게 될 것이다.”
-남세우 박사가 한국에 너무 늦게 알려졌다며 아쉬워하는 분이 많더라.
킴벌리: “지금이 딱 좋은 시기다. NIST 동료들이 남편의 연구를 이어가고 있으니 한국 과학자들이 연락해주시면 좋겠다(웃음).”
◇ 반도체 代父 김충기 교수의 조카
-남세우 박사와는 어떻게 만나 결혼했나..
킴벌리: “둘 다 NIST 연구원이었지만 남편은 콜로라도 연구소에서, 나는 워싱턴 D.C 연구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15년 동안은 서로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내가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자문실에 파견을 나갔는데 후임으로 온 사람이 세우였다. 인수인계를 위해 자료를 전달하고 설명하다 보니 일과 후에도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전혀 다른 성격인데도 잘 맞았다.”
앨런: “둘 다 고집이 세다(웃음).”
-어떤 남편이었나?
킴벌리: “에너지가 넘쳤다. 요리하는 걸 무척 좋아했고, 산악 자전거, 스노보드를 즐기는 스포츠광이었다. 휴가지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질 않았다. 심심할 틈 없이 사는 남편의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떤 요리를 즐겨 만들었는지.
킴벌리: “고급 요리부터 핫도그 같은 길거리 간식까지 다 만들었다. 연구소가 있는 볼더(콜로라도)는 작은 도시라 한국 식당이 없어서 남편이 직접 불고기, 갈비찜을 만들었다. 여름에 만들어준 팥빙수는 정말 맛있었다.”
-부친이 고체물리학계 권위자인 남상부 전 라이트대 교수라던데.
킴벌리: “은퇴하셨지만 지금도 연구하고 논문을 쓰신다.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유학 왔다가 결혼한 부모님은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살았는데 어머님이 만삭의 몸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세우를 낳게 돼 ‘서울 출생’이 됐단다(웃음). 여동생도 MIT를 나왔다.”
-외삼촌인 김충기 전 카이스트 교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기틀을 닦은 주역이다.
킴벌리: “남편이 삼촌 얘기를 많이 했다. 물리학자인 아버지와 함께 세우가 물리학에 흥미를 느끼고 파고들게 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그분의 자녀들과 수상 소식을 공유하며 함께 기뻐했다.”
◇ “동료들에게 수상의 功 돌렸을 것
-14개월간 뇌암과 투병하다 떠난 남 박사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나.
킴벌리: “암 진단은 받았지만 비관적인 상태는 아니어서 풀타임으로 일하며 치료를 받았는데, 작년 12월 갑자기 안 좋아지면서 1월에…. 너무도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마지막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앨런: “지난여름 만났을 때 세우는 말했다. 나는 꼭 이겨낼 거라고. 세우의 예측은 늘 맞았기 때문에 당연히 이겨낼 거라고 믿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장례식 때 국경을 초월해 과학자들이 와서 추모했다고 하더라.
킴벌리: “각자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남편을 만났을 텐데도 다들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 유머가 넘치고, 고집이 세고, 겸손하며, 뛰어난 과학자였다고.”
앨런: “그는 자기 업적을 동료들과 나누려 지독히도 애를 썼다. 보통 상은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세우는 동료들 이름도 넣어달라고 주최 측과 싸웠다. 자기가 받은 상을 본떠 여러 개를 만든 뒤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웃음).”
킴벌리: “남편은 자신의 모든 업적을 팀의 공으로 돌렸다. 남편이 살아 있었어도 한국에 다같이 왔을 것이다(웃음).”
-남세우 박사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지.
크리스탄: “코어(핵심) 기술을 발견한 과학자로, 창의적이고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던 과학자로.”
황지성: “백범 김구가 ‘눈길을 걸어갈 때 똑바로 걸어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는 시를 애송하셨다. 세우는 최선을 다해 과학의 길을 걸었고 그 뒤를 수많은 한국계 과학자가 걷게 될 것이다.”
-시상식인 오늘, 남편에게 인사를 건넨다면?
킴벌리: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 당신이 이뤄낸 것이 정말 아름답다.”
☞남세우
1970년 서울 출생. 미국 MIT에서 물리학 학사,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스탠퍼드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올해 1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5년 동안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종신연구원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에서 과학기술정책분석 자문으로 일했다. 2017년 ‘존 스튜어트 벨 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