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백(望百)의 노인은 매일 아침 휠체어를 타고 집 근처 커피숍으로 간다. 글을 쓰기 위해서다. 그의 구십 생애 중 “가장 바빴으나 찬란했던” 1970년대를 기록하는 중이다.
1971년부터 8년 동안 그는 청와대 중화학 담당 비서관으로 일했다. 오원철과 함께 박정희의 손발이 되어 방위산업, 중화학공업, 원자핵 개발을 기획하고 실행한 인물이다. “나는 ‘했다고 한다’가 아니라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는 “K2전차와 원전 수출, 반도체 산업의 번창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위에서 탄생한 것인데도 MZ세대는 박정희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아 서글프다”고 했다.
핵무장론과 ‘대왕고래’ 탐사로 소란한 요즘, 박정희 핵 개발과 원유 시추 사업의 전말을 알고 있는 ‘마지막 비서관’ 김광모를 만났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알리고 죽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했다.
◇ 박정희의 손과 발로 뛴 8년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관련서를 이미 여러 권 출간하셨다. 왜 또 글을 쓰시나.
“써도 써도 모자란다는 생각에…. 책을 내도 사람들이 읽지 않으니 요즘은 매주 한 편씩 글을 써서 카톡으로 배달한다. 카톡이란 놈이 참 신통하다. 원고지, 볼펜이 따로 없어도 되니 나 같은 늙은이에겐 아주 제격이다(웃음).”
-첫 책은 자비로 출간했더라.
“1988년 낸 ‘한국의 산업 발전과 중화학공업화 정책’이다. 박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중화학 정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 한 게 안타까워 그간의 자료와 문서, 현장 경험을 토대로 기술한 것이다. 그런데 출판해 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탓일까?
“신군부는 박정희 죽이기에 몰두했고, 주류 경제학자들은 유신 개발 독재의 산물이라며 저평가했다.”
-박정희의 중화학 선언은 왜 중요한가?
“박정희 최고의 업적은 새마을운동도, 고속도로도 아니다. 중화학공업화로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기초를 만든 것이다. 중화학이 뭔가. 철강, 기계, 조선, 석유화학, 전자 등 모든 산업의 기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지만 반도체도, AI 산업도 중화학의 토대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 시작은 방위산업이었더라.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 계획을 성공시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청와대 습격 사건, 울진삼척 지구 침투 사건 등 북한이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닉슨 독트린’과 함께 미국이 주한 미군 사단 하나를 철수하겠다는 통보를 해오자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오원철 수석이 이때 등장하는 건가?
“방위산업 추진 지시에 경제기획원은 주물선·특수강·중기계·조선소 등 4대 핵 공장 건설 계획을 세웠는데, 1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자 대통령이 크게 실망했다. 그때 서울대 공대 출신인 오원철 당시 상공부 광공전 차관보가 기막힌 대안을 마련해 왔다. 어떤 병기(兵器)도 분해하면 부품이 되는 것이니,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4대 핵 공장을 짓는 대신 부품 공장과 조립 공장을 설립하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병기를 양산할 수 있다고 보고한 것이다. 바로 다음 날 오원철은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 나는 중화학 및 방위산업 기획관으로 발령이 났다.”
-’공업 구조 개편’도 이때부터 시작되나?
“1971년 말부터 병기를 시제(試製)하는 단계에 들어갔는데 철강, 특수강, 화공약품 같은 원자재가 없으니 한계에 부닥쳤다. 오죽하면 청계천 고물 상가에 버려진 병기를 주워다 만들었겠나. 병기를 생산하려면 원자재를 만드는 중화학 공장과 정밀 가공 기술 인력이 필수라는 걸 절감하고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개편하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 대통령 단상으로 날아간 파편
-미국은 박정희의 방위산업, 중화학 선언에 반대했다던데.
“방위산업을 하려는 박정희의 의도와 역량을 의심해서 무기 제조 기술은커녕 설계 도면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국방과학연구소는 최종 제품을 분해한 뒤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개발했다. 마침내 창원 기계단지에서 기본 병기를 양산하고 유도 무기와 핵 개발까지 논의하게 되자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이 창원 단지를 시찰했고, 한국의 방위산업이 공산권 수중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판단에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 계획이 중단된다.”
-병기 시사(試射) 때의 일화가 흥미롭더라.
“모든 시사에 참석할 만큼 박 대통령은 방위산업을 어린애 돌보듯 키웠다. 한번은 대전차 지뢰를 선보이는 날이었는데, 탱크 밑에 지뢰를 넣고 폭파했더니 그 파편이 대통령 단상으로 날아가 난리가 났다. 아찔한 상황인데도 대통령은 ‘지뢰 유력이 대단하구나. 계속해!’ 하며 칭찬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지뢰가 터지지 않을까 봐 두 개를 설치했다가 너무 세게 폭발한 거였다(웃음).”
-박정희의 중화학공업이 유신 개발 독재의 산물이란 비판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유신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유신으로 인해 안정된 정권이 보장됐기 때문에 최소 10년이 걸리는 중화학공업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은 개인 치부가 아니라 그가 즐겨 쓰던 휘호대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나는 믿는다.”
-대기업 특혜라는 비판도 따른다.
“중화학공업은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당시 대기업들이 참여하지 않으려고 해서 박통이 일일이 달래고 설득했다. 설득도 안 되면 행정명령으로 지시해 맡겼을 정도다. 조선소만 해도 건설업으로 성공한 현대를 지명했는데 정주영 회장이 못 한다고 버티자 대통령이 호통을 치셨다. 부품 생산과 가공 공장은 중소기업체들에 맡겨, 이 시기 중소기업 육성이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 신군부의 박정희 죽이기
-박정희의 핵 개발은 거의 완성 단계에서 포기했다던데.
“1972년 9월 박통이 오원철 수석에게 핵 개발 계획을 지시했다. 오 수석은 원자력연구소 윤용구 소장, 핵 개발을 전공한 현경호 부소장과 회의한 뒤 극비리에 플루토늄탄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프랑스에서 핵연료 재처리 기술과 도면을 획득했는데, 이를 안 미국이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으면 고리 원전 2호기 차관을 중지하겠다고 통보해 중단됐다. (핵 개발이) 완성 단계도 아니었다. 정치인들이 잘 알지 못하면서 회고록에 그렇게 쓰더라.”
-그래도 박정희가 비밀리에 핵 개발을 지속했다고 하더라.
“공식적으로는 포기했다고 선언했지만, 핵연료공단은 기술 개발을 이어갔다. 그러나 박정희 서거 후 신군부가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고 핵 개발 관련 기관들을 모두 없애고 연구 인력도 퇴출시켰다. 국방과학연구소 인력을 반으로 줄이고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로 축소시키면서 기술이 크게 퇴보했다.”
-김진명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핵 물리학자로 등장하는 이휘소 박사가 서울대 화공과 동기라던데?
“뛰어난 학생이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세계적인 과학자였지만 박정희 지시로 핵을 개발하다 CIA에 죽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는 핵 개발과는 상관없는 소립자 물리학자였다. 박 대통령이 이휘소에게 친서를 보낸 적도 없다. 김진명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요즘 나오는 핵무장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대안도 없으면서 정치인들이 한마디씩 하는 것이다. 당장 누가 핵 개발을 주도할 것이며, 핵실험은 또 어디에서 할 건가.”
-6개월 내 핵을 가질 수 있다고도 한다.
“허무맹랑한 말들이다. 핵을 개발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윤석열 정부가 동해 석유 탐사 계획을 발표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원유 시추 실패담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1960년대 유공의 합작 회사였던 걸프 오일이 서해안 지역에 석유가 매장돼 있다는 미국 해양연구소의 에머리 보고서를 보여주면서 상공부에 대륙붕 개발 신청을 했다. 정부는 걸프오일, 텍사코, 셸 등 세 회사에 조광권을 주고 여섯 광구에서 원유 시추를 했다. 비용은 전액 시추자 부담이고 원유가 나오면 반씩 나누기로 한 조건이라 재정적 부담은 없었다. 그러나 모두 ‘드라이(징후 없음)’로 판정 났다. 일본과 분쟁지역인 7광구에서도 원유는 나오지 않았다.”
-상공부 석유화학과장을 지냈고, 대한석유공사에서도 근무하셨더라. 윤 정부의 동해 석유 탐사 가능성은 어떻게 보시나.
“석유 240억배럴이 있을 가능성이 20%라면 당연히 시추해야 한다. 부존 가능성 판단을 누가 어떻게 했는지가 관건인데, 나는 액트지오가 어떤 회사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것이 걱정된다. 박정희 때와 달리 국가 재정 부담이 큰 사업인데, 원유가 나오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져야 할 부담이 너무 크다.”
-박정희 대통령도 1976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우리도 석유국가가 됐다’고 발표했는데,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그해 박 대통령이 진해로 휴가를 가면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어느 기자가 석유 탐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돌발 질문을 하자, 당황한 대통령이 ‘원유는 있는데 경제성이 없어 포기했다’고 얼버무리셨다(웃음). 기대를 엄청 했는데 원유가 없다는 최종 결과에 대통령이 가장 크게 실망하셨다.”
◇ 尹 주위에 검사보다 과학자 많아야
-가까이서 본 박정희는 어떤 사람이었나?
“보고서에 깨알같이 메모하며 공부를 많이 하는 대통령이었다. 외강(外剛)이 몸에 배었으나 실은 내유(內柔)의 인사였다. 독일 함보른 광산에서 파독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울던 장면, 방산 현장에서 순직한 이석표 비서관을 꼭 살려내라며 울던 모습이 생생하다.”
-8년간 청와대에 있으면서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다던데.
“김정렴 실장의 ‘청와대 공무원 수칙’이었다. 명함도 못 만들게 하고, 대통령과 사진도 못 찍게 했으며,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먹게 했다(웃음). 모범공무훈장인 청조근정훈장 받은 것을 최고 영예로 느끼며 살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평가하나?
“강직하지만 포용이 없는 정치 스타일로 일관하다 무너진 게 안타깝다. 나는 그가 전자공학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올해는 중화학 선언 51년, 산업단지 60년이다.
“제조업 없이, 중화학 없이 첨단 산업도 없다. 자동차 부품 업체 없이 차세대 전기차를 만들 수 없고, 원전 방산 업체 없이 K원전·K방산 제품을 만들 수 없다. 반도체의 실리콘은 누가 만들 것인가. IMF 외환위기도 중화학 제품의 수출로 이겨냈다.”
-윤 대통령에게 조언한다면?
“방위산업, 항공산업, 원전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과학자와 기술자가 대우받고 존중받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한 경제학자는 한국 중화학공업의 일등 공신은 박정희의 기술 인력 양성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 주위에 검사보다 과학자가 많아야 한다.”
-왜 그렇게 박정희에게 ‘진심’인가?
“나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그만한 지도자, 애국자가 없었다.”
☞김광모
1933년 경남 김해 출생. 부산고,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상공부 화학과에 들어가 호남비료, 대한석유공사를 거쳐 상공부 석유화학과장으로 일했다. 1971년 청와대 경제2수석실에서 방위산업과 중화학, 핵개발 관련 실무를 맡았다. 삼성엔지니어링 대표, 삼성그룹 고문을 지냈다. ‘중화학 공업에 박정희의 혼이 살아 있다’ 등의 저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