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인천 남동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자유총연맹 창립 제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있다. 왼쪽은 한동훈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뉴시스

오랜 기자 생활에서 정치란 상대방의 약점을 먹고 사는 괴물이라는 것을 터득했다. 자기 장점(長點) 하나 없어도 상대방 약점만 파악하고 그것을 물고 늘어지면 꽤 떵떵거리며 행세할 수 있는 동네가 정치판이란 것을 알았다. 그 상대방이 나와는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졌을 때 그 ‘괴물’은 더욱 극악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음을 요즘 국민의힘 당대표 선출 과정에서 새삼 배우고 있다. 같은 동네 사람끼리 싸우는 일이 더 극렬하다는 것을….

국민의힘은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패배했다. 기진맥진해야 정상이다. 고개 숙이고 자숙하며,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이 있어도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그나마 국민에 대한 ‘패자(敗者)의 도리’다. 그런데 당대표 싸움이 시작되자 국힘당은 보란 듯이 벌떡 일어났다.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마치 본선(本選)에서는 쓰지 않고 감춰뒀던 비장의 힘이라도 있는 양 열심히 싸우고 있다.

그것도 국민의힘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지, 그리고 굳건히 재건해서 2년 뒤 지자체 선거, 그 1년 뒤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목표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라면 백번 싸워도 좋다. 그런데 기껏 싸운다는 것이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속편을 두고 알았느니 몰랐느니, 연판장을 돌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고, 더 나아가 친윤이냐 아니냐 문제로 시비를 벌이는 것을 보니 한마디로 기가 막힌다.

이번 당대표 후보로 출마한 네 사람 면면을 보면 모두 역량이 있는 분들이다. 모두 당을 이끌어가는 데 손색이 없는 정치인이고 이런 유(類)의 경선에 익숙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망이다. 실로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도 볼 수 없는 소재와 방식으로 싸우는 것을 보니 실망 정도를 넘어 배신감마저 든다. 더욱이 티격태격하며 주고받는 말싸움 수준을 보며 그들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부 전언에 따르면 한동훈씨가 검사 시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 문제 등이 후보 토론장의 도마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당의 대표 뽑는 것이 아니라 무슨 청문회나 특위라도 하는 모양새다. 이쯤 되면 국민의힘의 자해(自害) 행위는 도(度)를 넘을 수밖에 없다.

이 네 사람에 대한 실망도 실망이지만 제일 피해를 많이 받는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이다. 물론 윤 대통령이 누구를 선호하느냐는 것은 그간 언론과 당 안팎의 지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윤 대통령은 중립이다. 중립인 척하는 것으로 오해하도록 방치하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사안부터가 윤 대통령 부인이 관련된 것이고 한동훈씨가 장관일 때 일이어서 불똥이 윤 대통령한테 튈 것은 당연하고 윤 대통령으로서는 그것을 지레 방어할 필요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다.

당의 미래를 위해 윤 대통령은 저만큼 물러서 있는 것이 나라와 정부와 당을 위해 바람직하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본인이 국정을 운영하는 데 여당의 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당대표가 누가 됐으면 하는 희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만일 개인적 호불호(好不好)와 당의 선택이 어긋날 경우, 그러지 않아도 거의 협치 불능 상태인 대야(對野) 관계와 국정은 당·정의 불협화음이라는 또 다른 난맥에 부딪힐 것이 뻔하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총선에서 패배한 것보다 더 큰 타격일 수 있다. 한편으로 당대표가 대통령을 앞질러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이 뽑은 것이고 당대표는 당원이 뽑은 것, 그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 대통령은 자신의 절대적 중립을 당내외에 직접 천명하고 가능하다면 네 후보와 함께 만나 그런 중립을 공개화·공식화할 필요도 있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체제를 지켜낼 마지막 보루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윤 정부가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수십 년 후퇴한다. 윤 정부가 무너지기를 고대하고 있는 세력은 지금 윤 정권이 총선에서 패배하고 보수 세력 안의 경쟁에서도 패배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것은 윤 대통령 개인에 대한 호불호 문제도 아니고 윤 대통령 개인이 누구를 좋아하느냐와도 상관없다. 그는 자기가 이 나라의 오늘과 내일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명감으로 모든 사적(私的)인 것을 넘어서야 한다. 우선 당부터 재건하고 그것을 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 시국, 이 나라는 윤·한 갈등의 무대가 아니다.

김대중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