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별마당도서관을 찾은 시민들이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뉴시스

이사할 때 정말 난감한 작업 중 하나가 책 정리였다. 마음 같아선 다 옮기고 싶어도 부피며 무게 때문에 버리거나 팔게 된다. 다 읽은 책, 단순 흥미로 샀던 책, 자료 참조로 안 쓰는 책, 시류가 지나면 의미 없어지는 책들이 중고 박스에 담긴다. 정산해 보니 105권. 이렇게나 정리하고서도 남은 책이 꽤 있다. 개중엔 주로 공부하기 위한 벽돌 책이 많아 본의 아니게 이사를 노가다 곰방 작업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분명 거의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왔는데 2년 만에 책이 이렇게나 쌓였다. 적당히 나눠서 박스에 싣고 이사할 곳으로 택배를 보내고 나니 문득 본질적 질문이 떠올랐다. 난 왜 책을 사고 읽기 시작한 걸까. 독서는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됐지만 정작 독서를 주제로 글 써본 적이 없다. 너무 흔한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장점을 체감하기도 전에 일상이 돼서 그런 듯하다.

나를 본격적으로 독서로 이끈 동기는 부당함이었다. 중소기업 공단을 전전하는 청년들 대다수는 숙련도가 높아져도 시급은 거의 변하지 않음을 경험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오랫동안 두 가지 판단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이 상황이 매우 괴이하다고 느꼈지만, 사회는 공부 못한 인간들은 그런 취급당해도 싸다고 얘기했다. 후자 의견은 승자와 패자로 명확하게 나뉘어 있기에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모든 상황이 쉽게 정리됐다. 하지만 이를 반박하려면 훨씬 다양한 지식과 논리가 필요했다.

독서는 이 두 가지를 가장 빠르게 얻는 수단이었다. 한국 노동시장의 흐름, 부를 재산이 아닌 지식으로 세습하는 세태, 타국 노동자들의 커리어 패스, 주류 경제학이 가진 한계점 등을 책으로나마 알음알음 습득하면서 나만의 논리를 조금씩 쌓아나갈 수 있었다.

틀린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 시작한 독서는 옹이구멍 같던 시야도 틔게 했다. 나는 소셜 미디어로 지면을 얻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배경이 이렇다 보니 소셜 미디어에 꽤 우호적이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빨리 듣게 되며 기성 언론보다 더 날것의 견해를 접할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만으로 세상을 알기엔 한계가 뚜렷하다. 우선 깊은 의견을 듣기 어렵다. 이슈에 즉각 반응해야 하며 할애할 수 있는 분량 또한 한계가 뚜렷하다.

반면 책은 시류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작가의 생각을 가장 긴 호흡으로 정리한 매체다. 또한 소셜 미디어는 알고리즘이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글 위주로 노출한다. ‘많은 의견’은 볼 수 있어도 ‘다양한 의견’을 보기에 적합하진 않다. 이럴 때 책이 좋은 보완재가 되어준다. 내가 모르는 삶과 세계, 인식을 적당한 깊이로 빠르게 습득하는 데 독서만 한 방법이 없다. 책이 괜히 간접 체험 콘텐츠의 최고봉이겠는가.

공장 노동에 첫발 디뎠을 무렵엔 책 읽으라는 말이 그렇게나 듣기 싫었다. 시간 많고 세상 모르는 책상 물림들이 우쭐대는 방식인 줄만 알았다. 돌이켜보면 참 낯부끄러운 이분법이었다. 당연하지만 책으로 쌓은 지식은 삶의 지혜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서로 보완하며 한 사람의 인격을 한 층 드높인다.

나는 곧 젊음을 졸업하고 청장년기에 돌입한다. 이 시기엔 어리단 이유만으로 미숙함을 이해받을 수 없으며 동시에 어른이 될 준비도 마쳐야 한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어른의 모습은 깊이 생각할 줄 알면서도 진부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독서는 사유와 다양성을 덧붙이기 가장 좋은 활동이다. 이 글은 알라딘 장바구니에 쌓인 20만원어치 책을 눈 딱 감고 결제한 뒤 쓴 글이다.

천현우 작가·前 용접 근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