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8월 18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인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강력한 리더십 덕분에….”

지난주 일본에서 2박 3일 동안 열린 ‘한일미래비전 포럼’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관용구였다. 한국에서 김성한 전 안보실장,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 일본에서 야치 쇼타로 전 국가안보국장, 사사에 겐이치로 전 외무사무차관, 기하라 세이지 전 관방장관, 오노데라 이쓰노리 전 방위대신 등 양국의 정치인, 외교관, 기업 관계자, 언론인 등이 참석했다. 양국 정상의 결단이 지난 2년 새 두 나라 관계를 극적으로 개선시켰다는 게 한결같은 평가였다.

지난달 발표된 한국일보·요미우리신문 공동 여론조사에서 한·미·일 3국 안보 협력 강화에 대한 찬성 응답이 한국 79.2%, 일본 86%로 나타났다. 문재인 정권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수치다. 일본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느낀다는 우리 국민 응답은 2015년 61% 최고치보다 절반 이하인 29.7%로 떨어졌다.

양국 국민의 태도 변화는 특히 젊은 층에서 두드러졌다. 한국의 20대는 한·미·일 안보 협력 필요성에 대해 92%로 가장 높았고, 일본의 군사적 위협 걱정은 22%로 가장 낮았다. 일본 측 참석자는 “일본 10대 중 38%가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큰딸과 대화가 거의 없는데 BTS 표를 구해달라, 블랙핑크 표를 구해달라, 뉴진스 표를 구해달라고 할 때만 말을 걸어 온다”고 했다.

그는 또 “윤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훼손하는 모험까지 감수하며 양국 관계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그 의지를 충분히 일본 국민들에게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일본 산업계 관계자는 “기시다 총리로부터 이제 일본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서 화답해야 하는데 왜 기업들이 이렇게 호응해주지 않느냐는 책망을 들었다”고도 했다.

러시아·북한·중국 세 나라가 핵(核)을 움켜쥔 주먹을 휘두르며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는 정세가 한·일 두 나라가 협력할 수 있는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일본 전문가들은 “생각이 같은(like-minded) 나라끼리 뭉쳐서 위협에 맞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과 일본이 생각이 같다고?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대목이다.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성향을 구분 짓는 객관적인 기준은 각종 법안에 대한 표결 기록이다. 마찬가지로 각 국가의 정체성은 다양한 국제 이슈가 다뤄지는 유엔 결의안에 대한 표결로 드러난다.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과 가장 가까운 입장을 취해 온 나라는 어디일까. 일본이다. 두 나라의 유엔 결의안 표결이 같았던 경우가 무려 98%다. 몇 년 전 유엔 전문가는 논문을 통해 이 수치를 제시하며 “두 나라의 싱크로율이 놀랍다”고 평가했다.

왜 그럴까. 국가의 정책 방향을 결정짓는 지정학적 환경이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고 선진국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두 나라 모두 한반도 주변 지역의 안정과 평화가 최우선 과제다. 에너지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두 나라 모두 95%에 가깝고, 그래서 교역을 통해서만 생존이 가능하다. 두 나라 사이의 굴곡진 과거사에 가려졌을 뿐 한·일은 완벽한 운명 공동체라는 뜻이다.

일본의 경제적 위상은 과거만 못하고, 한국은 부쩍 힘을 키웠지만 아직 독자적으로 국제사회를 움직일 만한 역량에 못 미친다. 그러나 두 나라가 한목소리를 내면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일본 정치인은 “트럼프가 재집권했을 때 아시아 안보 질서를 헝클어트릴까 걱정된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 대응하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귀국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면서 핸드폰을 켜자 국내 뉴스가 최다 조회 순으로 화면에 떠올랐다.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대위원장이 ‘명품 백 대(對)국민 사과 용의’를 담은 김건희 여사 문자를 묵살했다는 기사, 국회에서 민주당이 해병대원 특검법을 단독 처리했다는 기사가 차례로 상위권에 배치됐다. 러·북·중 못지않은 위협이 국내에서 윤 대통령을 겨누고 있다.

야당이 해병대원 특검법을 거듭 밀어붙이는 건 윤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종 목적지로 가기 위한 빌드업 과정이다. 정권을 끝장내겠다는 야당의 핵실험이다. 윤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의 정치적 입장이 100% 가깝게 일치하는 운명 공동체라면 당연히 힘을 합쳐 대응해야 한다. 이미 참담한 패배로 끝난 총선 때 과거사로 진흙탕 내전을 벌일 때는 아닌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