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가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절망의 오늘을 희망의 내일로 바꿀 수 있다면 제가 가진 무엇이라도 다 내던지겠다"며 당 대표 출마 선언을 하고 있다. /이덕훈 기자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가 당 대표직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단언하건대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먹사니즘’이 우리의 유일한 이데올로기”라고 했다. ‘먹사니즘’은 젊은 사람들이 ‘귀차니즘’ ‘먹고사니즘’ 하는 식으로 영어식 ‘이즘(ism)’을 붙여 쓰는 말을 변용한 것이다. 이미 민주당을 장악해 대표직 경선은 하나마나이고 출마 선언도 요식 행위에 가깝다. 그런데 이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고 잘 준비된 연설문을 읽으면서 이재명의 정치 신제품 출시장으로 만들었다.

‘먹사니즘’은 얼핏 유치해 보이는 어휘지만 메시지는 1992년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에서 착안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한 대선에서 부시 행정부는 공산 진영과의 냉전에서 승리한 것을 최대 치적으로 내세웠다. 이에 맞서 46세의 젊은 민주당 후보 클린턴은 경기 침체 상황을 활용한 경제 구호로 현직 대통령을 누르고 승리했다. 이미 30년이 지났는데도 전 세계 선거판에서 가장 강력한 금과옥조 구호다.

그동안 이 전 대표는 상도의는 무시하고 돈 되는 건 불량 상품도 다 파는 잡상인처럼 표 되는 건 뭐든 주장하는 정치인 이미지였다. 성남시장 때는 다른 지자체보다 재정 형편이 나은데 생뚱맞게 ‘성남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정치쇼를 했다. 온갖 무상 시리즈를 주장하고, 선심성 돈 풀기를 ‘기본소득’으로 포장했다. 대선 때는 “이재명은 심는 겁니다”라며 ‘탈모 급여’ 같은 공약을 주장했다. 석 달 전 총선에서는 대파를 흔들며 윤석열 정부를 심판하겠다고 했다. 넉 달 전에는 “왜 중국을 집적거려요. 그냥 셰셰, 대만에도 셰셰. 이러면 되지. 중국과 대만 국내 문제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 있어요?”라고 했다. ‘개딸 지지층’을 제외하고 상식 있는 유권자들한테는 국가 대사를 맡기기에 가볍고 종잡을 수 없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번 대표직 출마 연설은 달랐다. 30분 연설이 진지했다. 대선 출마 연설로 써도 될 만큼 미래 지향적이었다. 주위에 매우 영리한 ‘이재명 대선팀’이 가동되면서 ‘합리적인 지도자’ 이미지 만들기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연설은 이런 식이었다. “지난주 영국은 14년 만에 정권 교체가 있었고 프랑스도 집권 여당을 누르고 좌파 연대가 승리했다. 국민들이 진보냐, 보수냐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경제와 줄어드는 복지 때문에 이대로는 못 살겠다 절규한 결과다. 우리 앞에도 중대한 갈림길이 놓여있다.” “성장의 회복, 지속 성장이 곧 민생이자 ‘먹사니즘’의 핵심이다. 국민 다수가 출생을 포기하고 자살률이 세계 최고일 만큼 희망과 미래가 없는 이 현실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 노동을 대부분 대체하는 초과학기술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기초 과학과 미래 기술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과학기술 강국으로 발돋움해 성장의 새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생산성은 극도로 높아져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생산해 내겠지만 노동 수요, 즉 일자리는 필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과학기술 시대에 일자리 현실을 외면한 망언이 될 것이다. 일자리는 인공지능 로봇을 통제하는 소수의 고급 노동과 로봇 비용보다 저렴한 노동을 감당하는 소외 노동으로 양분화될 것이다. 결국 소득·주거·교육·금융·에너지·의료, 이런 모든 삶의 기본 영역에서 구성원의 기본적인 삶을 권리로 인정하고 함께 책임져주는 기본 사회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이념 정책에 매달리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문재인 정부와 선을 긋는, 중도·실용 노선을 표방했다. 성장, 혁신, 미래 투자 같은 우파 담론도 선점했다. 그러면서 ‘기본 소득’처럼 그동안 주장해온 포퓰리즘 정책을 미래 사회 비전으로 그럴듯하게 재포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당 대표 경선은 김건희 여사의 ‘문자 읽씹’을 두고 후보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그 바람에 대통령실에서는 김건희 여사만 부각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보이지도 않는다. 동반 몰락을 앞당기는 집안 싸움이다. 그런 틈을 비집고 ‘이재명 대선팀’은 쉽고 간결하게 대중들에게 와닿는 ‘먹사니즘’이라는 새 브랜드 출시 기회로 삼았다. 총선에 이은 또 다른 ‘의문의 1패’인데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심하게 한 방 얻어맞은 그 강도를 감지하고 있기는 한가.

다만 ‘이재명의 먹사니즘’은 치명적 한계는 있다. ‘이재명의 막사니즘’이 최대 적이다. 개인사, 그리고 정치 인생에서 거친 언사에, 금 밟고 선 넘어 마구 살아온 ‘막사니즘 과거’로 온갖 재판을 받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곧 선출될 국민의힘 새 대표가 불협화음 내지 않고 남은 대통령 임기 동안 국민들에게 와닿는 정책을 펴면서 지지도를 동반 회복해야만 여당 대선 주자들이 ‘먹사니즘’을 능가할 산뜻한 정치 비전을 개발해 대선에서 승부할 동력과 시간도 벌 것이다. 지금처럼 갈등으로 날샌다면 차기 대선까지 남은 기간은 그저 정의감 강한 사법부가 ‘이재명의 막사니즘’을 신속 심판해서 그의 질주에 제동 걸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시간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