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삼식이 삼촌'에서 브로커 박두칠(송강호·왼쪽)과 국가재건의 꿈을 지닌 청년 정치인 김산(변요한)이 마주보고 있다. 미국 경제학 박사 출신의 야심찬 김산을 후원하기로 결심한 '삼식이 삼촌'역의 송강호는 푸근하면서도 비열한, 이성적이면서도 꿈을 향해 가는 복합적인 인물을 연기한다. /디즈니+

경제학자 장하준에게 “혹세무민하지 말라”고 질타한 건 유시민이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장하준 당시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대한민국 경제 상황을 ‘국가 비상 사태’로 진단했기 때문이다. “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은 대증요법에 불과하고, 최저임금 인상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라고 비판한 장하준은 “현재의 위기는 신산업 개발 부족으로 인해 주축 산업이 붕괴된 탓으로, 재벌을 적으로만 여기면 경제가 살아날 길이 없다”고 했다. ‘어용 지식인’을 자처한 유시민이 발끈한 건 당연했다. “세계적 석학이란 분이 참 갑갑하다. 문 정부가 하는 건 다 엉터리냐”며 반발했다.

진보 진영이 장하준을 불편해한 건 그때가 처음은 아니다. ‘소주성’을 설계한 장하성 사촌으로 일반 대중에겐 좌파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는 장하준이 박정희의 국가 주도 경제개발을 높이 평가하면서다. 산업 정책은 군부독재의 잔재이고 빈부 격차, 비정규직 급증, 심지어 IMF 외환 위기마저 박정희 개발 독재의 유산이라 우겨온 진보 정권에 장하준이 감히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추미애는 문 정부의 부동산 폭등도 박정희 탓이라고 했다.)

장하준이 박정희를 칭송하는 대목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국가 주도’라면 치를 떠는 시장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선진국들 발전 과정에 국가 주도 산업 정책이 예외 없이 시행됐다고 강조하는 그는, 미국과 세계은행이 ‘후진국의 만용’이라며 반대한 중화학공업화를 밀어붙인 박정희 덕에 80년대 3저(低) 호황을 수출 호기로 활용할 수 있었고, IMF 외환 위기 또한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양극화, 대량 해고, 비정규직 문제는 세계화를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한 90년대 민주 정부 이후 가속화됐는데 그 책임을 박정희에게 떠넘겼다고 해서 진보의 공분을 샀다.

장하준 얘기가 길어진 건 송강호 주연의 ‘삼식이 삼촌’ 때문이다. 1950~60년대를 다루는 시대극은 4·19 혁명 아니면 5·16 군사 정변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 드라마는 경제개발을 소재 삼아 눈길을 끌었다. ‘삼식이’라는 제목부터 삼시 세끼 배불리 먹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두 주인공의 포부를 상징한다.

문제는 세끼 밥 먹게 해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박정희가 아니라 장면의 민주당이 설계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산업 단지를 세우고 서울과 부산, 서울과 인천을 잇는 고속도로를 만들어 중국 7억 인구에게 신발을 수출하면 14억켤레를 팔 수 있다”고 외치는 주인공이 민주당 정치인이다.

물론 이승만도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장면 내각도 5개년 계획을 구상했다. 그러나 실행도 되기 전에 사실상 폐기됐다. 더구나 1962년 박정희가 발표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전 안(案)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고속도로만 해도 1964년 차관을 빌리러 서독에 간 박정희가 독일 재건에 생명줄이 된 아우토반을 보고 추진했고, 야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드러누워 반대 시위를 했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삼식이’는 표현의 자유라며 우긴다. 경제 발전의 공(功)조차 박정희에겐 돌리고 싶지 않은 걸까.

김광모 전 청와대 비서관이 보여준 70년대 중화학 관련 문서들은 박정희를 ‘만악의 근원’으로 배워온 586 끝물 기자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1973년 오일 쇼크로 산업 현장이 멈춰 섰을 때 박정희가 ‘공급 감량을 철회해 달라’며 미국 정유사들에 보낸 친서를 읽다간 울컥했다.

‘우리나라의 원유 소비는 대부분 산업용이다. 자동차를 더 타겠다든가 난방용으로 쓰겠다는 것이 아니다. 1개월에 25불의 급료를 받고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노무자들의 직장을 빼앗을 것인가. 우리가 아무 자원도 없이 열심히 일해서 경제성장을 이룩하려는 노력을 막으려고 하는가.’

구순의 김광모 비서관은 박정희는 경제에 “미쳐 있었다”고 회고했다. 고속도로와 제철 산업에 미쳐 있었고, 원전과 핵 개발에 미쳐 있었다. 세상이 자신을 독재자로 증오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1977년 봄, 기자들과의 환담 기록에 남아 있다. “나도 인간인 이상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 일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다른 나라 부럽지 않게 떳떳이 잘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난 일이 없다.”

폭염은 맹위를 떨치고 지난해 폐업한 자영업자만 100만명에 육박하는데, 민생은 안중에 없고 한 줌 권력을 위한 아귀다툼, 독재자 놀음에 여념이 없는 정치판을 보고 있자니,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던 박정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