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부도 수준의 절망. 동생이 그림 작가로 일하는 한 소설가는 이미지 생성 AI, 미드저니의 등장을 그렇게 표현했다. 남해 바닷가 마을에서 상경한 형제는 각각 글과 그림으로 성공을 꿈꿨다고 한다. 이제 서른 안팎 청년들.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그림 그리던 동생이 게임 회사 원화(原畵) 작가로 취업했을 때 형은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챗GPT에 이어 갑자기 툭 튀어나온 미드저니. 술에 거나하게 취한 동생은 고백했다. “형, 나 요즘 AI 공부해.” 반전은 그다음이다. 미드저니에 저항하며 관성에 젖은 선배들을 제치고 사장이 동생을 팀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혼자서 선보이는 4인분의 생산성. 고향 내려가 용접일 알아봐야겠다며 속앓이하던 동생은, 공포를 이겨내고 사다리에 올랐다.
이번에는 영화 사례.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된 서른 살 권한슬 감독이다. 올해 3월 두바이 AI 영화제에서 세계 500편의 후보작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는 수상 소식보다 더 눈길을 붙잡은 발언이 있다. “기성 감독들이 장악한 영화판에서 신인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장점이 더 크다고 믿어요.”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2000년대 초반의 박찬욱·김지운·봉준호는 그 무렵 2030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20년이 흐른 지금, 그 또래 젊은 감독의 소위 ‘입봉’은 낙타의 바늘구멍 통과 가능성이다. 권 감독은 내게 “예술의 민주화”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는 표현을 썼다. 신인에게는 기회 자체가 봉쇄된 ‘기득권 충무로’에 내려온 사다리. 권 감독이 출범시킨 AI 콘텐츠 프로덕션 ‘스튜디오 프리윌루전’에는, 함께하고 싶다는 동료와 후배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우려가 크다. 맞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다. 산업혁명은 시계공 구두공 등 맨손의 장인(匠人)들을 멸종으로 이끌었고, 컴퓨터와 자동화는 단순 사무직을 해체했다. 이번에는 AI. 게다가 이번에는 엘리트 전문가도 예외가 아니다. 인공지능은 의사가 의료 행위에 대해, 변호사가 서면 작성에 대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컴퓨터 코드에 대해, 교수가 학부 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독점력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는 것.
역사는 신기술이 일자리에 끼친 타격만큼이나 이전에 없던 직업을 탄생시킨 사실 역시 공평하게 서술하고 있다. 비행기가 등장하며 항공 승무원이 출현했고 페니실린과 텔레비전은 유전학자와 TV 연기자·방송인이라는 새 직업을 만들어냈다. 내비게이션은 런던과 서울 택시 기사의 전문성을 소멸시켰지만, 레이더와 GPS는 좀 더 많은 저숙련 노동자에게 항공교통관제사라는 직업의 문호를 개방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전문가의 희소성을 줄이고, 좀 더 많은 저·중숙련 노동자들이 ‘점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우려가 많다. 사라지기까지야 했겠냐마는 줄어든 건 사실이다. 교육의 사다리, 기회의 사다리, 희망의 사다리. 많은 청년이 유튜브와 코인에 몰입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부모 찬스에서 소외된 청년들이 그나마 공정하게 자신의 재능과 운으로 승부할 수 있다고 믿는 예외적 수단. 하지만 그 확률이 잔인하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일확천금의 도박을 믿기보다, AI가 당신의 사다리였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노력·성실과 비례하는, 유튜브와 코인보다 높은 가능성의 세계. 하나 더. 추락하는 합계출산율은 그 자체로 공포지만, 준비하는 청년에겐 기회다. 인구 감소와 노령자 급증에 직면한 세계, 진정한 난관은 일자리 부족이 아니라 노동력 부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