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조선일보와 인터뷰할 당시의 장기표 조무하 부부. "기자를 만나야 한다는데 여름 옷이 없어 오랜만에 원피스를 한 벌 사 입었다"며 수줍게 웃는 아내를 장기표가 따뜻한 눈길로 바라봤다.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만난 두 사람은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였다. /조선일보 DB

병문안을 가겠다고 하자 장기표는 프레스센터 지하의 보리굴비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말기암 진단을 받았지만 아직 걸을 힘은 있다고 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나왔다. 아내 조무하는 천하의 장기표를 ‘바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나, 이날은 말이 없었다. 남편의 밥 위에 가시를 발라낸 굴비와 계란찜을 얹어주며 간혹 한숨을 내쉬었다.

두 달 전 노동운동가 한석호와 함께 장기표를 만났을 때만 해도 병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총선 결과에 실망한 기색만이 역력했다. 낙선, 또 낙선의 연속이던 정치 인생이었지만 이번엔 다를 거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돌풍은 불지 않았다. 특권폐지당의 비례 득표율은 0.01%. 장기표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장기표에겐 여러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거리의 혁명가’, ‘영원한 재야’로 불렸으나 ‘몽상가’, ‘이상주의자’로도 조롱받았다. 소련 붕괴 후 제도권으로 간 재야의 동지들과 달리 “내가 추구하는 정치를 하겠다” 고집한 그는 창당과 낙선을 거듭하면서도 ‘정치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장리쌀로 고통받는 빈농 아버지를 보며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게 국민학생 때였다. 서울 법대에 갔으면 육법전서 달달 외워 판검사로 출세해야 하는데, 전태일 분신에 충격받은 이 돈키호테는 하필 학생운동에 몸을 던졌다. 마르크스주의의 허상을 목격한 뒤로는 민주시장주의에 기반한 복지국가 건설을 대안으로 삼았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경제활동이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바뀌어야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것이 장기표 사상의 핵심이었다. 지극히 이상적이지만 이 방법이 아니고는 대량 실업, 양극화, 팬데믹, 인간성 상실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숱한 실패 끝에 말년의 그가 시작한 것이 특권 폐지 운동이다. 1억5000만원이 넘는 연봉에 180가지 특혜를 누리며 정쟁을 일삼는 국회와 온갖 카르텔로 엮인 기성 정치 세력을 그냥 두고는 저출산 1위, 자살률 1위의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없다고 믿었다. 국민 반응도 뜨거웠다. 여의도 시위에 5000명이 참여했고,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이었다. 세상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이준석이 공개했듯 국회의원의 억대 연봉과 특권은 그대로이며, 민심의 선택을 받았다는 22대 국회는 민생이 도탄에 빠지든 말든 탄핵과 특검의 지뢰밭을 향해 ‘무뇌아들의 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장기표는 “군부독재와 싸울 때도 이렇게 무기력하진 않았다”고 했다. 무력감을 떨쳐내려 글을 썼다. 총선 후 석 달을 밤새워 집필한 ‘위기의 한국-추락이냐 도약이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상화된 갈등 공화국’ 대한민국에 보내는 충언이다. “비전도 전략도 없이 오직 집권욕에만 사로잡힌 여야가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뤄 나라와 민생을 거덜 내고 있다”고 질타한 그는,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고는 이 나라에 미래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장기표는 운동권 금기어였던 ‘사랑’ ‘행복’이란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던 투사였다. “사랑이 넘칠 때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이라고 한 그는, “도덕 없이 능력만 있으면 그게 도둑놈이다. 정치인의 통찰력은 좋은 머리와 책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 생활이 발라야 한다”고 했다. 불행하게도 작금의 정치판엔 도둑과 범죄자가 득실대고 있다.

말이 어눌해지고 체중이 급격히 줄어든 건 최근 한 달 새 일이다. 담낭에서 암세포가 발견됐고, 이미 여러 곳으로 전이돼 의사는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해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6개월에서 1년. 조무하는 “10년 징역을 살 땐 차라리 밖에 나와 아픈 게 낫겠다, 그러면 내가 간호라도 잘해줄텐데, 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라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장기표가 목청을 높였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항암도 안 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다만 정치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 만들지 못하고 가는 것이….” 팔순 투사의 눈가가 붉어졌다.

폭염 속 광화문을 평생의 동지였던 부부가 손 잡고 걸어갔다. 두 분이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느냐 묻자 장기표가 “에브리데이”라고 했다. 조무하가 웃었다. “농사짓는 사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데 민주화운동 좀 했다고 보상금을 받는 건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가” 일갈했던 부부였다.

광화문 네거리의 전광판은 그날도 여야의 진흙탕 싸움을 중계했다. 장기표의 특권폐지당이 내걸었던 공약이 떠올랐다. 주민투표로 의원직을 박탈하는 ‘국민 소환제’. 소환이 아니라 해산을 시켜도 시원치 않을 국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