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아주 독특한 세계사적 위상을 갖고 있다. 서구에서 영국과 비견된다. 영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서구의 최초 국가라면, 한국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가 중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한 나라다. 문명사적 의미가 있다. 국민들의 자긍심 고취에는 물론이고 외교적으로도 커다란 자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부분적 성공에 급급하고 거시적 시각이 결여돼 그 의미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 국가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돼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간 ‘한국의 후발 산업화와 전통, 사회 변화’를 미국에서 출간하고 잠시 방한한 하용출 워싱턴대 잭슨스쿨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만나 한국 사회 진단을 들었다.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의 잭슨스쿨은 1909년 설립된 국제정치대학원이다. 한국 연구 프로그램을 1949년 미국에서 가장 먼저 도입하고, 미국의 한국학 대부로 손꼽히는 제임스 B. 팔레(1934~2006) 교수가 30여 년 몸담은 곳이다. 이 전통 있는 한국학연구소를 지금은 하 교수가 이끌고 있다.

하용출 워싱턴대 잭슨스쿨 한국학연구소 소장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일어난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민주화 이후 30여 년이 남긴 부정적 유산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혁신적 변화를 이뤄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장련성 기자

-미·중 갈등에 이어 미국 대선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불안하다.

“냉전기에는 미·소 세력 균형으로 그 나름대로 예측 가능한 구조였다면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경쟁, 여기서 소외된 러시아의 반(反)작용, 이를 이용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핵 가진 북한 등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시기에 들어섰다. 미·중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상호 경제 의존도를 낮추면서 국내 문제에 더 치중하고 있다. 우리도 국제 전략 구상에서 신(新)사고를 해야 할 시점이다.”

-외교 신(新)사고란 무엇인가.

“지정학적 숙명론이나 약소국 인식부터 탈피해야 한다. 오랫동안 한국 외교는 복수 강대국을 동시에 관리하는 경험이 부족했다. 중화 질서, 일제 식민 지배, 해방 후 미국 등 한국의 대외 정책을 결정하고 영향을 준 것은 단일 강대국이었다. 흑백논리처럼 우방과 적 개념을 ‘완전한 우방’ 아니면 ‘완전한 적’으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를 갖게 됐다. 이것이 전략과 정책의 다원화를 어렵게 만든다. 대미 관계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일본과도 더 긴밀하게 협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지금도 북한과 접촉한다. 한·일이 협력해 새로운 북한 접근법을 구상해 미국을 설득하는 발상 전환도 필요하다. 그러면 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도 우왕좌왕할 이유가 없다. 중국에 대해서도 우리를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대국’으로, 우리를 ‘작은 나라’라고 했는데 말도 안 된다. 중국 사람들이 가진 낡은 프레임을 인정한 건데 시효가 한참 지난 시각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완전히 딴 나라가 됐고 정체성이 바뀌었다.”

-중국이 한국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아닌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다. 지리적으로 가깝다고 우리를 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출발이다. 일본도, 중국도 우리를 제대로 이해 못 한다. 그러려면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산업화, 민주화 성공이 문명사적 의미를 가진다는데 우리 내부는 왜 이리 불만도 많고 불안정한가.

“세계 어느 나라도 겪지 않은 변혁을 겪으면서 느끼는 혼란이라고 본다. 대변혁의 핵심은 아시아적 경제 발전을 이룬 사회가 서구적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민주화를 추진해 왔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에 완성된 최종 단계는 없다. 단기간에 될 수도 없고 혼란과 갈등이 따를 수밖에 없다. 또한 산업화 과정에서 독특한 사회 구조가 생겨 그걸 극복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

-독특한 사회 구조란 무엇인가.

“국가 주도형 산업화 과정에서 실적주의와 지역주의가 교묘히 결합됐다. 특정 학연·지연의 관료를 발탁하면서 전통적 사회 구조가 더 굳어졌다. 국가 권력에 접근해 인센티브를 더 많이 빼내려고 재벌의 인력 충원이 관료 충원을 닮아가는 모방 현상이 일어났다. 예컨대 경상도 사람 중에서 고시 합격자를 발탁하면 재벌들도 그 비슷한 인적 구성을 갖췄다. 관료의 명문대 출신 비율과 재벌 기업의 인력 구성이 비슷하다. 재벌의 모방으로 사회 전체에 학연·지연이 강화됐다. 나는 이것을 ‘신가족주의(neo-familism)’라고 부른다.”

-지금은 국가 주도형 경제 개발도 끝났고 서구 근대화처럼 개인주의화되는 것 아닌가.

“종교개혁에서 출발해 개인의 자율성이 내재화된 서구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외양은 개인주의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욕(私慾)주의다. 신가족주의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엄청난 배타성을 갖는다. 신가족주의는 그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완전히 배제된다. 신가족주의가 지금은 시장경제 메커니즘에 작동하면서 더 심각한 폐단이 나타나고 있다. 가령 대학교수가 자기 아들한테 자기 강의를 듣게 하고 A학점을 준다. 인맥을 동원해 자기 자식이 경쟁 우위를 점하게 만드는 것이다. ‘조국 사태’가 대표적이다.”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는 우려도 많다.

“민주주의는 크게 상부의 권력 이양, 허리에 해당하는 제도, 기저의 시민 의식이라는 삼층 구조다. 우리는 1987년 민주화로 평화적 정권 교체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허리 역할 제도들이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검찰의 중립성과 탈정치화, 교육의 자율성, 방송을 비롯한 언론의 독립성, 사법부의 탈정치화 등이 그에 해당한다. 또 산업화 과정에서 관료제가 공동화(空洞化)되고 민주화 과정에서 심하게 정치화됐다. 관료제 붕괴가 한국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주요인이 된 지 오래다. 흔히 공무원 철밥통을 얘기하면서 관료제 과잉을 걱정하는데 잘못된 진단이다. 관료제는 공정한 인사 제도 하에 독립된 법 집행을 하고 충분한 정보에 근거해 중립적 정책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우리나라 관료제는 일관된 정책 입안이나 집행이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단적인 예로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미국 공영방송에서 이상하다고 본 게, 미국은 사고 나면 공적 기관이 검사해서 나오는 결과를 받아들이는데 한국은 그러질 못한다. 권위를 인정받는 제도가 깨졌다. 지금 공신력을 가진 기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밖에 없는 것 같다. 나머지는 믿질 않는다. 정치와 행정의 경계선을 더 명확히 해야 한다.”

-어디서 해법을 찾아야 하나.

“정치 개혁부터 해야 한다. 파산 상태에 이른 정당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정당이 시대착오적 존재로 전락해, 새로운 문명사를 쓰고 있는 한국의 미래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다. 낡은 보수, 낡은 진보가 싸우다 지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재명 현상’이나 ‘한동훈 현상’이 갖는 의미는 한국의 정당 구조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당 제도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정당은 국민과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 엘리트주의에 근거해 자기들이 모든 걸 판단하고 선거 때만 유권자들한테 알랑거린다. 보수 정당은 경제 개발의 추억에 머물러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진보 정당은 낡은 서구 계급론에 입각한 정책을 일방적으로 수행해 왔다. 아래를 보는 풀뿌리 정당이 되어야지, 위를 쳐다보면 안 된다. 언론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던데, 이번 22대 국회 의원 300명 중 무소속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심각하다. 무소속이 상징하는 것은 일반 국민들 속에서 묵묵히 일하면서 아무리 정당 힘이 세더라도 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인데, 과거에는 더러 있다가 지금은 한 명도 없다. 정당이 위에서 내리꽂는 바람에 무소속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10년 정도 현장을 누비면서 일상에서 국민의 신뢰를 쌓고 국민을 이해하는 젊은 정치인이 많아져야 하는데 거의 안 보인다.”

-정치 개혁도 요원해 보이고 불안한 한국 사회의 방향성을 찾는 일도 지난해 보인다. 누가 할 수 있나.

“큰 그림을 이해하면 비전도 나오는데 이게 파악이 안 되니 모두가 혼란스럽다. 너무 막연하게 뭉뚱그려서, 갈등은 나쁜 것이다, 불안하다 하지 말고 좀 더 분석해서 보면 방향성을 찾을 수 있다. 우선 학계가 한국 사회를 제대로 연구해서 현상을 밝혀줄 필요가 있다. 서구의 학문 풍토로 우리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많다. 계급 이론, 계층 이론, 종속 이론 등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나가는데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은 대단히 드물다. 카를 마르크스의 계급 이론만 해도 영국에는 맞지만 독일조차 안 맞는다. 마르크스가 한국에 다시 태어나면 소외 이론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끈끈한 신가족주의에 뿌리를 둔 한국 사회에서는 소외되려야 소외될 수가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는 국민과 유리된 채 보수와 진보 공히 권력 장악 집단으로 전락했다. 경제적 파이가 커지는데 신가족주의에 묶여 더 넓은 공동체 의식이 상실됐다. 단적인 예로, 법 집행은 어느 사회든지 최저 및 최종적 단계를 의미하는데 고소·고발 남발 사회가 돼버렸다.

한국 사회는 완전히 서양 사회처럼 되기도 어렵고, 전통의 단절로 한국적 특성을 가진 사회로의 귀환도 어렵게 됐다. 외환 위기와 세계화 이후 물밀듯 밀려온 서양 제도와 관행이 한국 사회 공통의 규범과 관행을 통해 여과되지 못한 채 제각각 수용된 결과 개인이나 조직마다 상당한 편차를 보이게 된 것이 불안과 혼돈의 핵심이다. 이로 인해 권위 관계의 혼란과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간 갈등이 심각해진 것이다.

특혜나 특권을 조장하는 왜곡된 법 집행을 바로잡고 노사 관계, 사회복지 등 주요 집단 간 양보를 통해 사회 대타협을 이뤄 공동체 의식을 부활시켜야 한다.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지난 30여 년이 남긴 부정적 유산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혁신적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축은 리더십이다. 지도자는 국민에게 겸손하고 국민은 지도자를 믿고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세세한 정책까지 언급할 것도 아니다. 그건 테크노크라트가 할 일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리더십은 나아갈 큰 방향을 제시하면서 국민에게 안정감을 주고 신뢰받는 리더십이다.”

하용출 교수는 누구?

하용출(74) 워싱턴대 잭슨스쿨 한국학연구소 소장은 21년간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 등을 지낸 명망 있는 국제정치학자다. “한국학을 널리 알리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대 교수직을 떠나 지난 2008년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로 옮겼다. 한국에 있었다면 정년 퇴직했을 나이인데 지금도 강단에 서고 연구에 매진하면서 현역 교수로 활동한다. 1971년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거쳐 경제과학심의회의 사무관, 상공부 장기에너지계획 담당 사무관으로 일했다. 짧은 공무원 생활을 접고 미국 켄트주립대와 버클리대에서 국제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학자의 길을 걸어왔다. 러시아를 전공했지만 학문적 여정은 러시아나 국제정치학에만 머물지 않았다. 스탈린 시대 소련의 급격한 산업화를 연구하면서 서구 사회와는 다른, 한국 산업화의 특수성을 주목하게 됐고 서구 이론이 한국 사회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한국 사회 연구에 매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