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죄다 욕이었다. XX, 강만수 XX(웃음).”
세월이 깃든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현장에서 본 한국 경제 도전 실록’을 출간하고 만난 자리였다. 2008년 금융 위기 때의 결단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가는 잘사느냐 못사느냐 문제지만, 국제수지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였다.”
700쪽이 넘는 책은 1970년 경주 세무서 과장으로 시작해 2008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물러날 때까지 한국 경제의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었던 강만수가 후대에 전하는 백서이자 회고록이다. 가장 눈길을 끈 문장은 에필로그에 있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시대의 아픔이 아려와 조국이 나에게 준 훈장을 버리러 한강에 갔다. 40여 년 나의 헌신은 강물에 작은 동그라미 하나 남기는 슬픈 전설이 되었다.’
◇ 현재 위기는 정답 없는 킬러 문항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책을 출간했다.
“역사는 사람을 현명하게 한다. 오늘 우리가 있기까지 과정을 알면 미래를 위한 해법도 보이지 않을까 하여.”
-당시 보고서, 도표, 통계들이 주석 547건으로 깨알같이 등장한다.
“고등학교 때 작문 선생님이 살면서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일기를 쓰는 거라고 하셨다. 그날부터 일기를 썼다. 공직에선 업무 일지를 겸해 썼다. 경주 세무서 시절 내가 (비싼) 청자 담배를 피웠다고 비판한 지방지 기사까지 스크랩했다.”
-최근 역대 경제 장관들이 현 정부에 조언하는 자리에 가셨더라.
“현재 위기는 정답이 없는 킬러 문항이 대부분이다. 압도적인 여소야대 정국도 위기 관리를 어렵게 한다. 그렇더라도 정부는 최선을 다해 풀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지침은 ‘어떤 경우에도 전 정부 탓은 하지 않는다’였다. 그래서 당신을 뽑은 것 아니냐고 국민이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 수장이라면 어떻게 대처하겠나.
“난국에도 원론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먼저 반도체·자동차를 제외한 경상수지와 경쟁국 환율을 고려한 적정 환율을 유지해 수출을 촉진하고, 금리 인하와 함께 소득세·법인세 경감으로 투자를 촉진해야 한다. 국민께도 참고 견뎌야 할 상황이라고 말해야 한다. 2008년엔 정부가 먼저 공무원 월급과 정원을 동결했다.”
-수출은 호조세다. 지난 6월 경상수지 흑자가 122억달러로 7년 만의 최대 규모였다.
“반도체와 자동차 덕분이지 전통 제조업은 여전히 힘들 것이다. 내가 부산에서 만난 제조업자들 중엔 힘든 정도가 아니라 곧 문 닫아야 할 판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현대와 삼성은 한국 기업이 아니라 세계의 기업이란 전제에서 정책을 검토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부동산 가격도 오르고 있다.
“비(非)그린 지역의 그린벨트와 주거지에 적합한 농경지를 택지로 공급하는 식의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대도시 주변을 그린벨트로 묶어 놓은 사례는 런던을 빼고 세계 어느 대도시에도 없다. 젊은 층을 도심 멀리 흩어지게 해 출근만 1시간 이상 걸리게 하는 나라도 없다. 절대농지 제도는 주곡 자급이 안 되던 1970년대 슬픈 유산이다. 서울의 연소득 대비 주택가격 배율(PIR)이 24.9라는 보도가 있었다. 25년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집을 산다는 얘기다. 선진국 대도시도 10을 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저출산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신혼부부에게 보금자리 주택을 분양하고, 친척과 이웃의 가정 보육도 지원해야 하며, 고교 평준화를 폐지해 공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일본에선 평준화가 저소득층 자녀가 좋은 대학 가는 데 불리한 것으로 판명돼 폐지했다. MB 때 그린벨트에 보금자리 주택을 짓고, 평준화 폐지 수단으로 자율형 사립고를 만들고, 경제활동인구 감소에 대비한 마이스터고 설립으로 고졸 채용을 확대했는데 흐지부지된 것이 안타깝다. 독일의 취업 연령은 19세, 한국은 23세. 경제활동이 무려 4년이나 늦다”
◇ 25만원 지급? 25만원 감세해야
-민주당은 민생 지원금 25만원을 고수한다.
“재정 지출은 재정 건전성보다 지출의 적합성을 먼저 따져야 한다. 금융 위기 때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에 육박해 유가 보조금(24만원)을 지급했지만, 연 소득 3000만원 이하 근로자와 2000만원 이하 자영업자들에 한했다. 부자에게 25만원을 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정부 지출이 감소하면 내수가 더 위축된다는데.
“하버드대 교수들이 1970년대 이후 OECD 국가의 정책 91가지를 비교한 결과 감세 정책은 성공했고, 정부 지출 증가는 대부분 실패했다고 보고한 바 있다. 1달러 감세는 GDP를 3달러 늘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5만원을 주기보다 25만원 감세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장관 시절 ‘부자 감세’로 비판 받았다.
“재무장관은 눈만 뜨면 세금을 더 많이 받을 궁리를 하는 자리다. 역사에는 수염세, 오줌세도 있었다. 세금을 낮추는 것은 장기적으로 세금을 더 많이 받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증세를 위한 감율 정책’이라고 하면 정확하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볼 때 부자와 재벌들을 위해 세금을 깎아 줄 이유가 없다.”
-기업에 R&D 3중 공제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우리처럼 소규모 개방 경제 국가가 살아남을 길은 가격 경쟁을 위한 환율 정책, 기술 경쟁을 위한 R&D(연구 개발) 정책이다. 장관이 되고 나서 정부 예산 순위 11위였던 R&D를 1순위로 끌어올리고, 연구 개발 투자 준비금에 대한 매출액 3% 비용 공제, 투자 지출액에 대한 10% 세액공제, 인건비 포함 운영비에 대한 25% 세액공제를 시행했다. 그 결과 GDP 대비 R&D 비율(4.36%)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됐고, 수출 7대 강국으로 올라섰다.”
-종합부동산세는 정치 폭력이라고 했더라.
“종부세는 동서고금 인류사에 없었고, 공평성·보편성 등 조세 원칙에 하나도 맞지 않으며, 소득 없는 퇴직자에겐 몰수나 다름없는 것이라 그렇게 말했다. 장관 시절 폐지하려 했으나 여권에서도 반대가 많아 더 세게 밀어붙이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다.”
-상속세는 ‘불행세’라고 했다.
“변호사·세무사를 고용할 만큼은 재산이 없는 사람, 불의의 사고로 아무 준비도 못 하고 죽는 사람이 주로 낸다고 해서 IMF가 그렇게 표현했다. 막대한 상속세로 기업이 흔들리는 일도 허다하다. 경영이 어려우니 소득이 줄고 일자리 창출도 안 돼 근로소득세도 준다. 결과적으로 상속세보다 더 큰 세입 감소가 있었다는 것이 여러 선진국의 경험이다. 대영제국이 몰락한 원인 중 하나가 고율의 상속세였다는 교훈에서 호주, 캐나다는 상속세를 폐지했다.”
◇ 위기? 갈등과 싸우기가 더 힘들었다
-10년 간격으로 찾아온 외환 위기와 금융 위기 등 한국 경제가 격랑에 휩싸일 때 늘 현장에 있었다.
“어떤 기자가 이번 책을 서평하며 나를 ‘위기 때마다 욕먹은 남자’라고 표현했더라(웃음). 부가가치세와 금융실명제를 도입할 때도 욕을 많이 먹었다. 하나님 뜻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어려운 일을 내가 원해서 맡은 적은 한번도 없으니까.”
-두 위기는 어떻게 같고 달랐나?
“외환 위기가 성장에 대한 과욕이 부른 유동성 문제였다면, 세계 금융 위기는 투기 자본의 탐욕이 부른 불균형 문제였다. 두 시기 모두 경상수지가 악화됐고 환율이 달러당 800~900원대였다. 다행히 2008년엔 재정과 외환 보유액이 튼튼해 과감한 정책을 쓸 수 있었다. 물가만 잡으려다 환란을 초래한 외환 위기를 교훈 삼아 고평가된 환율, 과도한 세율, 부진한 R&D 투자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당시 고환율 정책으로 서민들은 고통을 겪었다.
“저소득층과 자영업자들께는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은 없다. 118명의 경제학자가 나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다시 돌아가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정책을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해서 ’킹만수’ ‘왕만수’로 불렸다.
“2008년 한 해 동안 내가 추진한 50여개 대책을 대통령이 한번도 반대하지 않아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물론 환율이 많이 오를 땐 하루 두 번 전화해 ‘문제 없겠냐’ 묻기도 하셨지만 ‘제가 잘할 테니 걱정 마시라’고 했다. 나라고 왜 두렵지 않았겠나. 결국 세계에서 가장 빨리, 교과서적으로 위기를 벗어났고, 훗날 기재부 출입 기자단이 ‘우리가 너무 모르고 비판만 했다’며 감사패를 주었다.”
-’위기보다 갈등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했던데.
“반대를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로마 시대 플루타르코스는 ‘민중에게 맞서면 정권이 어려워지고, 민중을 따라가면 나라가 흔들린다’고 했다.”
◇ 나라가 준 훈장을 버린 이유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서는 외환 위기 당시 강만수 재경원 차관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 악역으로 묘사된다.
“IMF 행을 서두른 한국은행과 이를 어떻게든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재경원을 정반대로 설정한 스토리에 분노를 느꼈다. 주연 여배우가 ‘나라를 망친 사람들에 대한 공분으로 연기했다’고 한 인터뷰를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당시 상황은 이번 책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40년 공직 생활 중 가장 뿌듯했던 때는 언제인가?
“국제금융국장이던 1992년, 내 뉴욕대 석사 논문을 토대로 삼성전자와 한국전력, 포항제철이 10년 만기 양키본드(미국 채권)를 발행했을 때다. 2억달러를 발행한 삼성전자는 반도체 성공 신화 시대로 들어갔고, 한전의 3억달러는 원전 건설의 자금이 됐다. 포항제철도 2억5000만 달러의 양키 본드 발행에 성공하면서 금융 메이저리그인 월스트리트에 진출하게 됐다. 한 자릿수 금리와 물가의 교두보도 그때 마련됐다.”
-가장 힘든 시기는 대우조선 비리 의혹으로 구속됐을 때인가?
“십 원 한 장 받은 게 없는데 4년 선고를 받았다. 바람 쌩쌩 부는 구치소의 기나긴 복도를 걸어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눈물만 흐르더라.”
-70대에 소설가로 등단했다.
“옥중의 고독과 애통과 수치를 참아내는 방법으로 소설을 쓰게 됐다.”
-고등학교 때 소설을 쓴다며 휴학도 했다던데.
“부산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며 공부하기가 너무 힘들어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짓고 글 쓰며 살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존 스타인벡이 중졸이란 보도에 고교 중퇴도 괜찮겠다 생각한 건데, 나중에 보니 대학 중퇴의 오보였다(웃음).”
-등단작 ‘동백꽃처럼’은 첫사랑 얘기더라. 집에서 한소리 들으셨겠다.
“결혼 첫해에 아내 혼자 시골 우리집에 내려갔다가 어머니 장롱에서 내 일기장과 연애편지를 발견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라 괜찮다(웃음).”
-단편 ‘세종로 블루스’는 부가가치세 도입과 관련해 신군부의 조사를 받는 얘기다.
“부가세 시행이 10·26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 신군부가 부가세 폐지를 결정하고는 실무자인 나도 소환했다. 부가세가 뭔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내국세의 30%를 차지하는 세금이라고 설명했고, 국방 예산이 25% 정도 되니 부가세를 폐지하면 국방이 어려워질 거라고도 했다. 겁도 없이(웃음). 다행히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부가세의 중요성을 알게 됐고, 더 이상 폐지를 논하지 말라고 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딸 대신 외손녀를 키운다고 들었다.
“재수하고 있다. 어미 애비도 고3 뒷바라지는 힘들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다 보니 손녀에게 꾸중 들으며 심부름만 하고 있다. 교재 잘못 사 왔다고 혼나고, 줄인말 못 알아듣는다고 혼나고.”
-강만수는 무서운 호랑이 이미지인데.
“나를 고집 세고 독선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해야 할 일을 언제 어디서나 했을 뿐이다. 같이 일해 본 사람은 나와 일하기 편하다고 말한다. 원만하고 발 넓다는 사람 중에 일 잘하는 사람 별로 못 봤다(웃음).”
-다음 소설은 검찰 특수부 얘기라고.
“집사람은 또 무슨 고초를 당하려고 그러냐며 말리는데, 도둑 열 명을 놓쳐도 억울한 사람 한 명을 만들지 않는 세상을 위해 나의 아픔을 소설로 썼다.”
-훈장은 왜 한강에 버리셨나?
“내가 평생을 바친 나의 조국이 아니었다는 말만 하고 싶다.”
☞강만수
1945년 경남 합천 출생. 경남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뉴욕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행정고시에 합격, 재무부 이재국장·국제금융국장·세제실장으로 일했고 관세청장, 통산부 차관, 재경부 차관을 거쳐 이명박 정부 때 기획재정부 장관, KDB금융그룹 회장을 지냈다. 2022년 ‘동백꽃처럼’이 한국소설신인상에 당선,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