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43회>

1949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 모습. 중앙청 건물 윗부분에 내걸린 대형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 ‘한번 뭉처 민국 수립, 다시 뭉처 실지 회복’은 독립 1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에게 공모한 것이었다./조선일보 DB

1949년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 그런데 대한민국은?

중국공산당의 최고 영도자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의 톈안먼 망루에 올라 광장의 군중을 내려다보며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새로운 국가가 성립되는 사건을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선 한 낱말로 건국(建國)이라 한다. 당연히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일 건국되었다. 중국에선 아무도 그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오쩌둥이 1893년 후난성 샹탄(湘潭)현에서 태어난 것만큼이나 견고한 사실(hard fact)이기 때문이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때 “건국 이래”란 명백하게 “1949년 10월 1일 이후”를 의미한다. 2019년 중국 전역엔 “건국 70주년”을 경축하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중국에서는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의 중국은 국민당이 통치하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었고, 1911년까지는 만주족 황제가 통치하는 대청국(大淸國)이었다는 사실을.

201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70주년 포스터 (왼쪽).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포스터 “우리들의 위대한 조국의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며” (오른쪽)./공공부문

중국인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에선 “1948년 건국”이란 말만 나오면 편향된 방송·언론이 떼로 들고 일어나 난데없는 “친일파” 딱지를 붙이면서 광란의 마녀사냥을 펼치는가? 그들은 국민·주권·영토를 갖춘 대한민국이라즌 국가가 1948년 이전에 이미 지구 어딘가에 벌써 세워져서 안으로는 세금을 징수하고 군인을 징집하고, 밖으로는 전 세계를 향해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판타지에 빠져 있는가?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국민적 동의의 절차도 없이, 국제적 승인의 과정도 없이 1919년 상하이에서 이미 세워져 있었다는 비현실적 주장을 펼칠 수 있는가?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아래 치러진 국민 총선거에서 총유권자의 90% 이상이 참여하여 당당하게 세운 “대한민국”의 성립 과정 자체를 통째로 부정하려는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을 동일시하는 부자(父子)의 궤변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광복절 사면 발표문에서 “대한민국 건국 50년을 맞이하여 건국기념일인 8월 15일자로 사면을 단행하였다”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1948년) 민주공화국”을 세웠음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광복회장 이종찬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음을 극구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설령 일본이 강제로 점령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있었고, 주권 행사가 어려웠을 뿐이다. 대한제국이 소멸되고 나라 전체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보는가? 아니다.” (조선일보, 2023. 08.15.)

참고로 이종찬은 “신군부” 전두환 정권에서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을 맡았으며, 김대중 정권의 안기부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요즘 건국이란 말만 나오면 발끈하는 이종찬은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건국 60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의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심지어는 재미 교포를 상대로 “건국 60주년 기념 특강”을 한 적도 있다. 이종찬의 광폭 횡보가 사회적 물의를 빚게 되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철우(아들)가 언론 인터뷰에서 해명했다.

“대한민국은 이미 존재하는 나라였기에 건국을 논할 이유가 없다. 광복회는 없던 국가가 1919년에 건국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한제국은 이미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다자조약도 체결한 국가다. 그 효력이 계속됨을 1986년 대한민국 외교부가 확인했다. 그 국가가 1919년에 이름을 바꾸고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지,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니다.” (동아일보, 2024-08-19)

연세대 법학전문원 교수 이철우(왼쪽)과 그의 부친인 광복회장 이종찬 (오른쪽)./공공부문

“나라는 있었고, 주권 행사가 어려웠을 뿐”이라는 이종찬의 주장이나 “대한민국은 이미 존재하는 나라였기에 건국을 논할 이유가 없다”는 이철우의 논변을 보면, 이 두 사람은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계속 같은 나라가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들의 주장은 사회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상식적이지도 않다.

이들의 주장대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이 같은 나라의 연장이라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만약 국제법상 독자적 국가임을 인정한다면) 대한제국에서 이어진 다 같은 나라인가?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같은 나라란 말인가? 시대를 달리하여, 이념을 교체하여 한반도에 들어선 모든 국가가 다 같은 나라란 소리인가? 그렇게 되면 신라, 고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다 같은 나라란 말인데, 역사학적으로나 사회과학적으로나 일말의 타당성도 없는 비논리적, 비학술적, 비상식적 주장이다.

대한제국은 국가의 주권을 고종(高宗, 재위 1897-1907) 황제가 독점했던 제국(帝國), 곧 황제의 나라였다. 이와 달리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에 기초한 민주공화제의 나라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제법상 국가임을 인정한다면) 김씨 왕조가 사회주의 이념을 내걸고 수령 일인이 지배하는 나라다. 이 세 나라는 국체(國體), 정체(政體), 국시(國是), 어느 면에서도 같은 나라가 아니다.

황제 일인 지배의 제국(帝國)과 국민주권의 민국(民國)은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완벽하게 다른 정체(政體)의 나라이다. 마찬가지로 유엔에 동시 가입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와 이념이 완벽하게 상충하는 다른 나라가 아닐 수 없다.


건국(建國)은 사회과학적 용어, 엄밀하게 사용해야

물론 여기서 “나라”는 그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이나 터전 따위 모호한 의미가 아니라 국민·주권·영토를 확보하고 “배타적 영토에서 합법적으로 무력을 독점한” 국가(國家, state)를 가리킨다. 모름지기 한 국가의 건국을 논할 때는 사회과학적으로 엄밀하고 역사학적으로 타당한 과학적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광복회의 수장이나 사립 명문대학의 법학자라면 더더욱 엄밀한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들이 사용하는 “나라”라는 개념은 그저 ‘대대로 살아온 우리 땅’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느슨하고 감정적이고, 지극히 비과학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다시금 중국의 사례를 보자. 중국에선 그 누구도 황제 지배체제의 나라 대청제국(大淸帝國, 1644-1912)과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절대로 같은 나라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청제국은 1911년 공화 혁명을 통해서 무너졌으며, 그 이후 국공내전을 치르고서 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건국의 개념은 전통 시대 중국의 여러 조대(朝代)에도 적용된다. 청나라(淸國), 명나라(明國), 송나라(宋國) 등등의 표현이 말해주듯 중국사에서 조대의 교체는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의미했다. 전통의 군현제 위에서 황제 지배체제가 계속됐음에도 중국인들은 조대가 교체될 때마다 다른 나라(國)가 새로 섰다고 생각해 왔다. 쉽게 말해, 대청국(大淸國)과 대명국(大明國, 1368-1644)은 절대로 같은 나라라 할 수가 없다. 대청국과 중화민국,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시위./공공부문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이 같은 나라라는 이철우의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그는 “대한제국은 이미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다자조약도 체결한 국가”이고 “그 효력이 계속됨을 1986년 대한민국 외교부가 확인했다”며 “그 국가가 1919년에 이름을 바꾸고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지,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니다”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국제외교에서 이미 확립된 국가 계승(succession of states)의 개념에 어긋나는 궤변에 불과하다. 국가 계승의 개념에 따르면, 특정 영토에 새로 들어선 주권 국가(sovereign state)는 계승국(successor state)으로서 동일 영토를 영유했던 과거 국가의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는 ‘국제적 법인(international legel person)’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이 맺었던 국제조약의 효력을 인정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국가 계승의 개념에 근거한 것이지 이철우가 말하듯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이 같은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사의 사례도 다르지 않다. 대한제국 훨씬 이전에 대청제국은 이미 근대 국제질서에 편입되어 다자조약을 체결한 국가로서 반세기 이상 존속됐다. 홍콩의 사례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듯 중화인민공화국은 ‘국제적 법인’으로서 대청제국이 맺은 조약의 효력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학자도 “그 국가가 1949년에 이름을 바꾸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지,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니다”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대청제국과 중화민국,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이념과 정부형태뿐만 아니라 국인(國人)의 정체성도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대청제국에선 황제에 복속된 신민(臣民)은 중화민국에서 국민(國民)으로, 다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선 인민(人民) 혹은 공민(公民)으로 거듭났다.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던 한민족의 조상들은 일제강점기엔 황국의 신민으로 지배당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나서야 자유와 인권을 갖는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1919년에 이름만 바꿔서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니·····. 그러한 시대착오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에 세계 학계의 그 누가 동의하겠는가?


민주공화국은 왕조의 유습과 황제 지배의 부정에서 출발

대한민국은 조선왕조의 신분제와 대한제국의 황권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서 출발했다. 개개인이 자유와 권리를 갖고 주권자가 되는 국민의 나라 “민국(民國)”의 개념은 온 백성이 황제의 신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황제의 나라 “제국(帝國)”에 대한 가장 강력한 안티테제이다. 1919년 상황에서 민국을 세우겠다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발상은 그 자체가 의식 혁명이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11일 상하이에서 공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바로 그러한 의식 혁명의 결과였다. 또한 4월 23일 13도 대표가 급하게 국민대회를 열어서 당시의 경성부(京城府)에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선포한 “한성(漢城) 정부 약법(約法), 혹은 임시(臨時) 약헌(約憲)”에서도 그 점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며, 제3조는 대한민국 인민의 일체 평등을 천명하고, 제4조는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고 명기한다. 한성 약법 역시 제1조에서 “국체는 민주제”를, 제2조에서 “정체는 대의제”를 채택하고, 제3조에서 “국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여 세계 평화의 행운을 증진케 함”이라고 천명한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한성 정부 약법 모두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선양하는 자유주의적 기본 가치, 민주공화제, 대의제 민주주의를 결합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말했듯, 민주공화제의 주인은 공화국의 시민(市民), 공민(公民), 국민(國民)이지만, 대한제국의 주인은 황제였으며, 대한제국의 백성은 황제의 신민들이었다. 제국의 신민들이 공화국의 시민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명실공히 혁명적 변화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한성 정부 약법의 저자들은 공화 혁명의 정신을 반영했으며, 나아가 당대 가장 선진적인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들은 더 이상 왕조의 백성이나 제국의 신민이 되길 거부하고 스스로 민주공화제의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공화국의 시민이 되고자 했다. 물론 그들의 꿈은 29년이나 한반도 38선 이남에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나서야 실현될 수 있었다.

1948년 5월 10일 선거. 유권자의 96.4%가 선거인 등록을 하고, 그중 95.5%가 투표했다./공공부문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중앙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5월 10일 총선거는 전국 만 21세 이상 남녀 총유권자 813만여 명 중에서 785만명(96.4%)이 선거인 등록을 했고, 그중 95.5%가 투표를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는 그렇게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나라 세우기’의 열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명실공히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였다. 그날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은 5월 31일 제헌의회를 개원했으며, 7월 17일에는 드디어 대한민국 헌법이 공표됐다. 그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대 대통령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요컨대 한국 헌정사 최초의 ‘민주 정권’은 1948년 수립된 바로 그 정부였다.” (송재윤, 조선칼럼, “’1948년 정부’가 대한민국 첫 민주정부다”)

1948년에야 한반도 38선 이남에 비로소 국민·주권·영토를 가진 나라가 새로 서서 합법적으로 무력을 독점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한자문화권의 모든 언어에서 그렇게 새 나라가 세워지는 사건을 건국(建國)이라 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팩트다. 신성한 팩트를 정확하게 말하는 이를 일컬어 “뉴라이트”라 부른다면, 온 국민이 자랑스럽게 “내가 뉴라이트다!”라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지금이 어느 때인데 대규모 국가보조금을 받는 광복회란 조직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뉴라이트 판별 기준 9가지” 따위나 제시하며 시대착오적 사상검증을 하고 있는가? 광복회장이 어떻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용산에 일제 밀정이 있다”는 막말을 내뱉을 수 있는가? 그들의 행동거지가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의 망동과 과연 다른가? 야만적 마녀사냥과 광란의 여론몰이에 맞서서 차분히 역사의 팩트를 살펴야 할 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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