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7일 서울 삼청동 갤러리 현대에서 만난 재미 조각가 존 배가 '회선'(1974년작) 등 자신의 초기 작품들 앞에서 밝게 웃었다. 87세의 그는 "언제 숨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며, "나는 참 러키한 사람"이라고 했다. 회고전 '운명의 조우'는 10월 20일까지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다. /김지호 기자

존 배는 강철을 녹여 바흐의 선율을 빚는 조각가다. 28세였던 1965년 미국 예술 명문 프랫인스티튜트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돼, 불과 철의 예술인 용접(鎔接) 조각으로 뉴욕 화단에 일찌감치 이름을 알렸다. 60~70년대 그의 브루클린 작업실은 김환기, 백남준, 황병기 등 가난한 한국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아지트였고, 거기서 한류의 싹이 움텄다.

10월 20일까지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운명의 조우’는 존 배의 역작을 모국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가족과 함께 서울에 온 그는 느리지만 신중한 어조로 지나온 생을 관조했다. 삶의 시작점이자 명예였고, 동시에 무거운 짐이기도 했던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야기할 땐 노(老)작가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늘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다.

'존 배: 운명의 조우'전에 전시되는 다큐멘터리 영상의 한 장면. 1000도가 넘는 열로 조각가 존 배가 강철을 용접하는 모습이다. /뉴욕한국문화원 제작, 갤러리 현대 제공

◇ 여덟 살에 처음 본 아버지 얼굴

-모국에서의 마지막 회고전을 여는 소감이 궁금합니다.

“언제 숨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지요.”

-대표작 ‘회선(回旋·involution)’은 이번 전시에도 나왔더군요.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는 작품이에요. 저는 우주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죄책감을 느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분들 후손으로 살려면 인류애적인 일,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제가 걷는 길이 그것에 부응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야만 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여덟 살 때 처음 아버지 얼굴을 봤다는 것(웃음). 숨어다니지 않으면 감옥에 계셨으니까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몇 년 만에 집에 오실 때만 아기를 가질 수 있었지요.”

-아버지를 처음 봤을 때 어땠습니까?

“개울을 건너오는 아버지에게 온식구가 달려가 안기는데 막내인 나는 뒤에 멍하니 서 있었죠. 아버지가 미안했던지 저를 데리고 서울로 가 가죽 신발을 맞춰주셨어요. 그런데 저는 친구들이 볼까 부끄러워 나무 위에 감춰두었다가 동네에 엿장수가 왔길래 엿 한 보따리와 바꿔왔지요. 어머니의 놀란 표정이 지금도 기억납니다(웃음).”

-할아버지 배창근(1867~1909)은 구한말 의병장이었지요?

“의병 활동 중 일본 순사를 2명 죽이고 체포됐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셨어요. 아버지가 겨우 열두 살, 열세 살 때였지요. 할아버지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나라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독립운동을 하라.”

-아버지 배민수(1896~1968)는 ‘순국한 의병장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으로 평생을 사셨다고요.

“어릴 땐 개구쟁이고 공부도 안 하는 학생이었다고 해요. 한 번은 반에서 1등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탄로가 났는데 할아버지가 당신 바지를 걷어올리더니 회초리로 자기 다리를 피가 나도록 때리시더랍니다. 그날부터 정신을 차리셨다고(웃음).”

-아버지는 조만식 선생과 농촌운동을 하다 미국으로 유학 가 목사가 되셨지요?

“평양에서 만난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미국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권해서, 매코믹 신학대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오셨죠. 안익태 선생이 1935년 작곡한 애국가 악보를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온 사람도 아버지였다고 해요. 6·25 때는 미국 구호물자를 한국으로 들여오는 데 큰 역할을 하셨지요.”

-어머니 최순옥도 엘리트였다던데요.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던 오빠들 덕분에 모스크바 사립학교에 다녔을 정도로 고등교육을 받은 분이죠. 미소 공동회담 때 소련 측 통역을 했을 정도로 러시아어에 능통하셨어요.”

-도망 다니는 아버지 대신 집안을 건사하셨겠군요.

“일본 순사와 형사들이 저희 집을 수시로 찾아와 온갖 가구와 집기들을 뒤집어놓고 갔어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어머니는 집 근처 작은 땅에 온통 과일나무를 심어 가꾸셨지요. 현실은 혹독했지만 어머니는 그곳을 ‘에덴의 동산’이라고 부르며 위로 받으셨어요.”

1965년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하면서 아버지 배민수 목사(오른쪽), 어머니 최순옥 여사와 찍은 기념사진. /존 배 제공

◇ 국가유공자 연금을 거절한 까닭

-해방 후 미국으로 갔다가 자식들만 남겨두고 부모님은 다시 한국으로 오셨다고요?

“나라 재건을 도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때 제가 열다섯 살이고 어머니는 ‘네가 싫다고 하면 미국에 남겠다’고 했는데 제가 ‘조국이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가셔야죠’ 하더랍니다. 풋볼만 계속 할 수 있다면 어머니와 작별은 견딜 수 있다고 믿었던 10대 소년이었죠(웃음).”

-부모님은 농촌 개혁운동을 하셨나요?

“정부 수립 후 아버지는 노동국에서 일하다 농촌 현장으로 들어가셨어요. 가난하고 무지한 농촌을 살리려면 지도자를 양성하고, 농업을 현대화해야 한다고 믿었지요.”

-연세대에 땅을 기증하셨다고요.

“학생들에게 현대 농법을 가르치기 위해 경기 고양의 야산에 농장을 지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연로해지시니 더 이상 이어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연세대 농업개발원에 5만6000평의 땅을 기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업을 물려받지는 않으셨네요.

“뉴욕에서 공부할 때 잠시 귀국해 부모님의 농업학교에 간 적이 있어요. 마침 모를 심는 시기라 저도 학생들과 함께 논에 들어갔는데, 한 청년이 저를 불러내더니 말하더군요. ‘우리는 이 일을 너보다 더 잘할 수 있어. 그렇지만 너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지.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네가 잘하는 일을 해.’ 그 청년이 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준 셈입니다(웃음).”

-김영삼 정부 때였던 1993년 배창근·배민수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는데, 두 분 몫으로 매달 지급되는 국가유공자 유족연금을 거절하셨더군요.

“독립운동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신 거지 제가 한 게 아니니까요. 저와는 상관없는 돈이었고, 대한민국 국민이 애써 낸 세금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10월 20일까지 서울 삼청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존 배의 '운명의 조우'전. 강철을 1000도가 넘는 뜨거운 불에 녹여 자르고 쌓고 이어붙이길 반복하는 용접 작업을 통해 음악적 선율이 흐르는 듯한 형태의 미를 갖춘 것이 존 배 추상조각의 특징이다. /뉴시스

◇ 노동자의 금속, 鐵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고요.

“어머니는 제가 무언가를 보면 묘사하려 했다고 하셨어요. 그림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저녁밥을 먹고 나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울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희미해졌지요.”

-첫 개인전을 열다섯 살에 열었더군요.

“탄광 도시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미술 선생님이 너에겐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다시며 전시를 열어주셨지요(웃음).”

-차별받진 않았나요?

“백인과 흑인 자리를 따로 구별하던 시대였는데, 저는 늘 백인 자리에 가서 앉았어요. 자격지심이라는 게 전혀 없는 아이였죠(웃음).”

-프랫 인스티튜트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더군요.

“돈은 없었지만 대학은 누구나 가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건축학과 두 곳과 미술학과 세 곳에 지원했는데 프랫에서 4년 전액 장학금 제안을 해왔지요. 그건 ‘뉴욕으로 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1958년의 뉴욕은 ‘마법’이었다고 하셨지요?

“그 시기의 뉴욕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어요. 위대한 예술가들이 아직 생존해 있었고 새로운 미술운동이 태어났죠. 프랫은 그 모든 것들에 도전하도록 내게 담대함을 주었어요.”

-프랫 인스티튜트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돼 화제가 됐습니다.

“순수예술을 가르치는 학과가 없던 프랫에 임용돼 조각과를 만들고 커리큘럼을 개발했어요. 미술만 하는 게 아니라 현상학, 생체공학 수업을 창설했고, 음악·무용 등 다학제적인 연구를 시도했습니다. 바우하우스처럼.”

-왜 강철로 작업하십니까?

“점토 석고 왁스도 해봤지만, 열을 가하면 부드럽게 구부러지고 열을 멈추면 다시 단단해지는 철의 형질이 좋았어요. 철이 ‘노동자의 금속’이라는 점도 좋았습니다. 강하고 탄력적이며 유연한.”

-존 배의 조각은 바흐의 음악을 닮았다고도 합니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음악은 다음 음표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제 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에 올 음(音), 다음에 올 선(線)은 무엇인가? 다음에 오는 음은 처음의 음에 대답해야 하고, 그들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작품에 개성이 생겨나지요. 마사 그레이엄 같은 위대한 무용수들의 동작, 미식축구 선수들의 멋진 자세와 움직임도 제게 영감을 줍니다.”

10월 20일까지 서울 삼청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존 배의 '운명의 조우' 전. 사진 속 작품은 2024년 신작인 '천국과 지상(Heaven and Earth)' 연작이다. /뉴시스

◇ 김환기, 백남준, 황병기

-김환기의 뉴욕 시대를 함께하셨지요?

“김환기 선생은 저보다 20년 위였지만 순수하고 정직하며 겸손한 분이었지요. ‘좋은 작가가 되려면 욕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백남준은 어땠습니까?

“누구보다 스마트한 작가였죠. 거지 차림으로 활보했지만 모두 치밀하게 짜인 계획 아래 움직이는 거였어요. 일종의 배우처럼(웃음).”

-선생님 댁이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고요.

“밥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아내밖에 없어서(웃음).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는 다들 저희 집으로 몰려왔죠. 황병기·유덕형과는 삼총사였고, 열다섯 살에 뉴욕으로 온 백건우와도 가까이 지냈어요. 백건우는 피아노 이상으로 사진을 잘 찍었고, 그림도 잘 그리던 청년이었습니다.”

-70년 예술 인생에 비하면 작품은 100여 점에 불과합니다. 왜 조수를 두지 않았나요?

“저는 인생도 예술도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어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삶의 방식은 불교의 선(禪)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웃음). 조각을 하면서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자신의 추측이나 판단에 갇혀 미래를 결정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모든 걸 계획된 대로만 살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계획은 그 과정에서 진화해야 하죠. 스텝 바이 스텝. 인생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 데 저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삶을 칭찬할까요?

“글쎄요. 적어도 부끄럽게 해 드리진 않았으니 잘 살아왔다고 하시지 않을까요(웃음)?”

-지난 8·15에 있었던 정부와 광복회의 갈등은 알고 계신가요?

“저는 광복회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본래 시끄러운 것이지요(웃음).

'존 배: 운명의 조우' 전에 전시된 영상의 한 장면. 미국 코네티컷 작업실에 작가가 서 있는 모습이다. /뉴욕한국문화원 제작, 갤러리 현대 제공

☞존 배

1937년 서울 출생. 11세에 미국으로 가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자랐다.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조각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28세에 프랫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돼 2000년에 은퇴했다. 피악 파리에 초청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개인전, 그룹전을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뉴욕 얼터너티브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지난해 ‘존 배: 리퀴드 스틸’이 리졸리에서 출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