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영국 총선에서는 영국의 형편없는 치과 진료가 쟁점이었다. 야당인 노동당은 “보수당 정권에서 치과 진료를 구해내자”는 슬로건을 내걸어 압도적인 표 차이로 14년 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1인당 국민소득 5만8000달러인 세계 6대 경제 대국에서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영국은 공공 의료 체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통해 전 국민에게 무상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부상한 국민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숭고한 정신에서 NHS가 출발했다. 의사에 대한 영국인들의 신뢰도 절대적이다. 기자 역시 수년 전 영국 연수 때 천식이 있는 아들에게 흡입기 사용 방법을 설명하면서 우리 부부에게 몇 번씩 “아이가 알아들은 것 같냐”고 확인하는 인도계 의사에게 작은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영국인들은 이 숭고한 의사들을 쉽게 만날 수 없다. 영국 전역에는 치과 진료소가 1만1000여 곳 있지만 치료 진료소의 90%가 NHS 신규 환자를 받지 않는다. 운 좋게 예약되더라도 1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정부 지원금만으로는 병원 운영이 힘들어 의사들이 NHS 진료를 피하고 값비싼 개인 진료 위주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참다 못한 영국인들은 펜치와 강력 접착제를 이용해 셀프 치료를 하거나 동유럽 등 해외로 원정 치료를 떠나는 지경이다.
치과 외 분야도 붕괴 직전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대기 환자 숫자는 10여 년 전 260만명에서 작년 733만명으로 급증했고, 18주 내에 적절한 치료를 받은 비율도 92%에서 46%로 반 토막 났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박봉에 시달린 의사들이 2배 넘게 벌 수 있는 미국·캐나다·호주 등으로 줄줄이 떠난 탓도 크다. 영국 의사협회에 따르면 작년에만 최소 1만5000명의 의사가 개인 진료·해외 이주를 이유로 NHS를 떠났다.
반면 한국은 ‘불친절’ ‘3분 진료’에 대한 불만이 크지만 언제든지 의사를 만날 수 있다. 의료 접근성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1위, 의료의 질과 효율성을 나타내는 지표(회피 가능 사망률)도 10위권이다. 전국 어디에 살든 고속철을 타고 반나절 만에 상경해 ‘빅5′ 대학 병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명의(名醫) 쇼핑’을 할 수 있다. 설령 불치병이라도 최고의 명의에게 치료를 받는다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될 것이다. 그래서 골수 좌파들도 공공 의료에 일부 이윤 동기를 결합한 한국의 의료 체계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이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의정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한국 의료 서비스의 장점마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갈수록 커진다. 주변의 전공의·의대생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여전히 분노 지수가 높다. 이들은 특히 ‘말실수’라고 해명하긴 했지만 보건복지부 장차관이 ‘의사’를 ‘의새’라고 말한 데 대해 이를 간다. 한 전공의는 “시간당 최저임금만 받고 인턴·레지던트로 5년간 주당 80시간 이상 일하고 군의관으로도 3년 복무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쏙 빼고 의사들을 악마화한다”고 말했다. 만약 의대생의 유급이 현실화되면 내년 유급생 3000명, 신입생 4500명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진료 체제 개편이 재정 부담과 함께 소비자들에게 적잖은 혼란을 줄 수도 있다. 우선 정부가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건보 재정에서 지원하기로 한 금액이 1조1783억원에 달한다. 전공의의 공백을 돈으로 메우는 셈이다. 여기에 지역과 필수 의료 확충을 위해 5년간 20조원 이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슬아슬한 건보 재정을 감안하면 결국 국민들의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당장 앞으로는 밤중에 아이의 이마에 상처가 났을 경우 지금처럼 편하게 대형 병원 응급실을 이용할 수 없다. 경증 환자로 판정되면 진료비의 90%를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정부가 6개월만 버티면 이긴다는 생각은 버리기 바란다. 이 난리를 치르고 돈은 돈대로 쓰고 나아지는 게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재앙이다. 의사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하루아침에 정부를 겨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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