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나는 가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남편이 있었다면 박 전 대통령이 퇴진의 공세에 휩싸였을 때 그는 뭐라고 조언했을까?’ 비슷한 생각은 근자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재선 출마를 포기하고 후보 자리를 해리스 부통령에게 넘겨줬을 때 새삼 떠올랐다. 바이든의 건강을 염려한 그의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재선 포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보도 때문이었다. 대통령 자리가 반려자의 생각과 철학에 좌우될 수 있는 것인가.
또 한 가지 엉뚱한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삼성맨들의 심기일전을 독려하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다. 그는 ‘자식과 마누라 빼고 전부 바꾼다는 정신’으로 혁신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아마도 이 회장은 속으로는 ‘마누라와 자식까지 다 바꾼다는 각오’를 말 속에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내 나름의 짓궂은 상상이었다.
어쭙잖게 내조(內助) 또는 외조를 깊이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것이 상황을 바꾸고(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를 바꾸고 수많은 인명을 좌지우지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 정치적으로 심각한 국면에 처해있다. 4·10 총선에서 패한 이후 그는 절대적 여소야대에 직면해 있다. 그것도 그냥 여소야대가 아니라 여극소(與極小), 야극대(野極大)의 정점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동의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정치판에서 윤 대통령 보고 무슨 춤을 어떻게 추라는 것인지 보수층도 헷갈려하고 있다. 대통령은 거부권 이외에는 아무런 대처 수단이 없다. 여당과의 관계도 원만치 않다. 야당은 걸핏하면 탄핵을 들먹이고 특위를 들고 나온다. 대통령 알기를 동네 뭣 보듯 한다. 그 대표적 무기 중에 하나가 바로 대통령 부인의 문제다.
윤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노동 개혁, 연금 개혁, 교육 개혁을 내세웠을 때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에서 정체된 ‘그늘’을 걷어내는 또 하나의 역사를 잇는구나 하고 내심 기대했었다. 그런데 그의 개혁 과제는 시동(始動)도 제대로 걸지 못한 상태에서 암초에 부딪히고 있다.
그의 지지 세력인 보수-우파들까지 윤 대통령의 지지부진에 실망하고 있다. 보수층은 김문수 장관의 소신 발언에 박수를 보낸다. 아마도 그런 철학이 대통령에게서 나왔으면 하는 역설적 바람일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단죄(斷罪)하지 못하는 윤 대통령의 미온적 태도도 비난받고 있다. 이들은 이재명 대표의 사법 처리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4건의 사법 리스크 중 어느 하나라도 유죄 판결이 나면 그의 정치적 앞날은 결정적으로 허물어질 것이고 이것이 꽉 막힌 정국을 푸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사법부의 구성이 보수층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렵게 돼있는 데다가 우리의 3심 제도는 당장 사법적 결말을 가져오기 어렵게 하고 있다. 엊그제 미국에서 있었던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사법 당국의 선고 연기 결정은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즉 사법이 정치의 영역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는 법조계의 판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에게 바라는 보수층의 옵션도 드러나고 있다. 부인 문제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진솔한 대국민 사과다. 개혁의 과제들을 정리하고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개인적 생각, 가족적 체면이 중요할 수 없다. 개혁 과제에 한정해서 야당과 대타협을 한다는 것도 한 옵션이다. 이 경우 이 대표의 사법 처리를 유예하도록 정리할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현 상태대로 지리멸렬하게 연명해서 역사의 보잘것없는 한 페이지로 남는 것이다. 보수 정권 재창출도 단연코 포기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 개인의 흥망성쇠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연장 선상으로는 보수 정권의 재창출은 난감한 상태다.
윤 대통령이 처한 이런 곤궁한 상황을 그의 부인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남편에 대한 조언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굳이 이 시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떠올리고 질 바이든을 거론하며 삼성 이 회장의 발언을 멋대로 가정해서 만들어내는 이유는 현 시국에 대한 윤 대통령 부인의 생각이 궁금하고 또 절실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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